『우리가 고아가 아니었을 때』, 조재선, 다시문학, 20204
어떤 옷을 입을까, 무얼 먹을까, 어디를 갈까. 여행을 떠나기 몇 날 며칠 전부터 설레고 전날에는 잠을 설치기도 한다. 손꼽아 기다리던 여행도 끝 무렵에는 여지없이 얼른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그렇지만 어떤 여행은 조금 더디게 지나가고, 조금 천천히 끝났으면 할 때가 있다. 삶이라는 여행이 그렇다. 특히 부모님을 생각하면 사계절이 변하는 건 좋지만, 시간이 흐르며 부모가 늙고 병드는 것은 싫어진다. 아이가 빨리 자라서 내 손이 필요하지 않은 나이가 되었으면 좋겠다가도 아이의 고운 살냄새를 맡을 수 없게 되면 서운한 마음이 인다.
편지로 안부를 전하던 사람들이 이메일을 보내게 되고, 이메일에서 문자메시지로, 다시 실시간 채팅으로 문명의 발전에 맞추어 살아간다. 익숙한 것들이 낯선 것이 되고 낯선 것들이 어느새 익숙한 것이 된다. 조재선 작가의 수필집 『우리가 고아가 아니었을 때』는 한때 우리의 삶 속에 있었으나 지금은 조용히 사라져 버린 것들에 관한 이야기다. 텔레비전에 흰 점과 검은 점이 어지럽게 교차하는 화면 조정시간, 동네마다 있던 빨간 굴뚝의 목욕탕, 50원씩 넣는 전자오락실과 만홧가게, 카펜터스의 레코드판과 도서관 앞의 커피 자판기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의 글에 마음을 빼앗길 수밖에 없다. 그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종국에는 ‘그립다’라는 말이 떠오른다. 그립다는 말은 지금 내 옆에 없는 것, 그래서 영영 만날 수도, 다시 만질 수도 없는 것에서 기인한다. 자분자분 속삭이는 그의 문장은 그리움의 속내를 드러내 놓지 않으면서도 흠뻑 빠지게 만든다.
저자는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해 봤을 법한 일들을 순박하고 무던하게 그려낸다. 「영어 공부」라는 제목의 꼭지는 영어 강사 민병철에서 시작해, ‘관악산 입구에서 장사 바구니를 놓고 떡, 김밥, 달걀을 팔던 어머니가 건네준 구겨진 지폐에는 늘 약간의 기름기가 묻어있었다’는 이야기를 지나, 賞(상)자가 찍힌 영어사전과 영어 교사로서 자신의 신념으로 연결되고, 인간이 언어를 쓰는 까닭은 결국 다른 사람의 인격과 사연을 포용하기 위함이며 우리의 삶은 끊임없는 협업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는 은근한 문장은 어릴 때 집마다 있었던, 아랫목에 깔린 이불 같다.
『우리가 고아가 아니었을 때』는 단순히 추억 여행만 하다가 끝나지 않는다. 그가 아이에서 어른으로 자라면서 보고 듣고 느꼈던 것들을 차분하게 옮겨 적은 다정한 삶의 지혜서다. 구석구석 적어 놓은 세세한 그의 기억이 얼마나 자신의 삶을 아끼고 보듬었는지를 증명한다. 짧지 않은 인생의 서사를 차분한 묘사로 녹여내며 독자를 다독인다. 중년의 비슷한 연배의 사람들에게는 ‘어? 전에 우리가 만난 적이 있었을까?’ 하며 언젠가 학교 앞 문방구에서 마주친 동네 친구가 된 기분이 들게 만든다.
누구에게나 쾌활한 시절이 있었다. 사람들이 꽉 찬 명동 거리를 인파에 끼여서 밀려가듯 친구들과 같이 걸었고, 시끌벅적한 피맛골의 허름한 어느 술집에서 밤이 늦도록 막걸리를 마셨다. 흰쌀밥에 계란말이만 있어도 밥이 꿀맛이었던 가난한 시절도 있었다. 지금은 각자의 자리에서 저마다의 역할을 짊어지고 어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느 시절의 사진을 한 장씩 꺼내어 보게 만드는 책이다. 어느새 쉰을 넘긴 어른이 되었지만 마음속 한구석에는 아직도 어린 왕자가 머물고 있을 것 같은 작가 조재선의 문장이 참 포근하다. 오늘 아침 내리고 쌓이는 눈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