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다닐 때 말이죠. 교수님이 낭독하시던 책을 딱 덮더니, '철이 든다'는 것은 계절의 변화를 느낄 때가 아닐까요? 하셨습니다. 계절=철이니까.. 학생들은 어리둥절했지만 교수님은 갑자기 창문 밖 노을 지는 풍경을 감상하셨습니다. 잉?
나이가 들수록 사진첩에 꽃과 나무 사진이 잔뜩 채워지는 것과 일맥상통인 듯합니다. 그리고 각자 좋아하는 계절에 대한 이유들이 생깁니다. 단순히 더워서, 추워서를 떠나 개인적인 추억 때문에, 상처 때문에, 좋아하는 옷을 입고 싶어서 등등. 여하튼 저는 얼마 전까지는 겨울을 가장 좋아했습니다. 이벤트가 많으니까요. 올해 들어 가장 추운 날, 첫눈, 공휴일, 연예인들이 상을 막 받고, 새해 전야, 뉴욕 타임스퀘어에서 공연도 하고, 눈이 많이 와서 사람들이 출근을 못하고(나는 왜 했지), '내가 꼽은 올해 최고의 영화' 이런 것도 해야 합니다. 해가 바뀌어도 계속 겨울인 것도 좋았습니다만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 '이벤트'라는 것도 점점 무뎌지니까요.
그렇지만 작년에는 이벤트가 없는 겨울을 보내면서, 결국 봄을 기다렸습니다. 봄에는 나의 주말이 좀 더 채워지지 않을까 해서요. 우리 아티스트들도 마찬가지겠지요. 500년 동안 공연을 못한 것 같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그나마 백신이 잘 깔려있는 컴퓨터를 켜고, 괜히 한번 백신 프로그램을 돌려서 최적화를 하고, 와이파이를 연결해서 스트리밍을 시작했습니다.
오늘도 폰 갤러리 털어야지
전기뱀장어의 <조금 이른 봄소풍>을 준비하면서 조화 꽃나무 가지들을 몇 개 샀습니다. 노오란 개나리, 빠알간 장미, 하이얀 백합도 있었지만 저는 분홍빛의 벚꽃을 골랐습니다. 눙눙과 잘 어울릴 것 같아서요. 마음이 통했나? 눙눙도 분홍빛의 블라우스를 입고 왔더라고요. 신난다.
나랑 통해
마이크 스탠드를 꽃나무로 휘감고 카메라에 비치는 전기뱀장어를 보니 조금 이를지는 모르겠지만 함께 봄소풍 온 것 같고 아주 좋더라고요. '라이브앳'스탭들은 능수능란하게 스트리밍 준비를 마쳤고 저도 휴대폰에서 '라이브앳'을 열어 스트리밍을 관람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비장)
이번 공연에 트럼본 연주로 함께한 장민우는 전뱀과 오랜 친구인데요. 덕분에 사운드가 풍성해졌을 뿐 아니라, '라이브앳' 온라인 공연도 진행해주시고 사진도 찍어주시고 아주 바쁘셨습니다.
전뱀은 예상했던 대로 현장 진행과 온라인 소통을 원활하게 이끌어가 줬고 라이브도 평소보다 좀 더 화사하고 들뜬 느낌이었습니다. 정말 들판으로 나가 선선한 바람을 맞으면서 들었다면 좋았을 테지만, 아시다시피 기억 조작단으로 명성이 자자한 전뱀은 어두운 지하 공연장에서도 봄기운을 느낄 수 있게 해 줍니다.
'라이브앳'에서 SNS를 통해 폴라로이드와 다꾸콘 스티커 증정 이벤트를 진행했는데요. 당첨되신 분들이 각자 실물을 받으셨겠지만, 우리는 아쉬우니까 괜히 사진을 공유합니다.
깐예슬 본 사람?
그 바로 다음 주에는 최악의 커플의 온라인 공연이 있었습니다.
날이 점점 따듯해지고 있는 것 같아 방심했다간 찬바람을 잔뜩 맞고 몸이 으슬으슬해지기 십상인 그런 날씨였습니다. 우주히피와 배인혁은 워낙 다정한 사이니까 리허설 시간도 편하게 잡아 밤 10시가 다 되어 유썸 사무실에 모였습니다.
나 이거 어디서 봤어.
우주히피는 다 잘하다 보니까 일이 많습니다. 음향도 잡아야 하고, 유튜브 로그인도 해야 하고, 인혁이 까까도 사줘야 하고.
댓글을 잘 달아야 합니다.
개인적인 친분을 자랑하는 벨로주 음향감독님이 우주히피 인스타에 댓글을 잘못 달았다가 소환됐습니다. 하마터면 제가 마이크 리버브 조정을 맡아서 욕을 욕을 쌍으로 먹을 뻔했습니다만 다행히 전문가가 오셨기에 저는 화면 조정과 송출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리허설 때는 알 수 없는 노이즈와 불안한 사운드 때문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현장 음향도 아닌 온라인으로 송출이다 보니 여러 가지 오류가 있고, 알 수 없는 수맥이 흐르고 귀신이 붙어 이것저것 조정해보아도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눈이 감겨 도저히 인격을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어서야 모두들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늦잠을 자고 나와 피곤한 척하고 있었더니, 음향감독님이 USB 하나를 당당히 꺼내시곤 컴퓨터 세팅을 마쳤습니다. 또 다른 백신일까요. 아침까지 잠 한숨 못 자고 연구하셨더더니 USB 하나로 바로 악귀를 내쫓으시고 훌륭한 사운드를 빵빵 연결해내셨습니다. 전문가 만세!
그나저나 우주히피는 조명 세팅에 심혈을 기울여야 하는 피사체입니다. '나는 머리 땜에 그늘져'라고 직접 코멘트해주셔서 아래쪽에 조명을 잔뜩 깔아봤지만 영 맘에 들어하시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요리조리 실험을 거쳐 완성된 조명은 꽤나 분위기 있었는데, 공연 중에 조명을 꺼버렸더니 오히려 우주히피 마음에는 쏙 드는 눈치입니다. 그래도 저는, 어두워져 버린 두 분의 얼굴빛이 걱정되어 틈틈이 조명을 켜 두었습니다.
최악의 커플은 각자의 음악으로도 특색 있고 훌륭한 뮤지션들이지만 함께 편곡한 곡을 들으면 놀랄 만큼 새로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풀 영상이 비공개로 되어있지만, 곧 또 보실 수 있겠죠?
배인혁은 꼭 우주히피의 '그냥'을 공개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네. 조만간 공개할게요.
이건 기껏 두 분이 만들어달라 그래서 만들었더니 너무 무섭다고 안 올리신다고 해서 못 올렸어요. 그쵸. 너무 잔인한 것 같긴 합니다.
같은 마음으로 봄을 기다릴 텐데, 전뱀은 집에 있을 팬들과 다정하게 조금 이른 봄소풍을 떠나고, 최커는 집에나 붙어있어!!라는 톤으로 장난스럽게 놀아줍니다. 그래도 우리와 함께 시간을 보내주는 마음은 똑같겠지요.
얼마 전부터 유썸 사무실에는 기다랗고 반짝이는 화병이 들어오고 꽃이 꽂혔습니다. 두 송이의 장미를 조그마한 꽃잎들이 은은하게 둘러싸고 있어요. 일주일을 버텨주면 고맙겠다고 생각했는데 한 달이 되도록 짱짱하게 사무실에서 살아남더니 지금은 조금 말라비틀어지고 있습니다. 새 꽃을 사 오시겠다더니 아직이네요. 그렇다고 푸석푸석해진 꽃들이 싫은 건 아닙니다. 아직도 꽃잎에 색이 생생하고 식물 특유의 향이 은은하거든요.
앞으로도 유썸 아티스트의 온라인 공연이 몇 번 더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분명 '대체'가 되지는 못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재미있는 '새 것'이기는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