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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영 Feb 20. 2021

유류품 (遺留品)

글의궤도 4호

관객의취향에서는 매일매일 글쓰는 모임 '글의궤도'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글의궤도 멤버들의 매일 쓴 글 중 한편을 골라 일주일에 한번씩 소개합니다. 아래의 글은 매일 쓴 글의 일부입니다.


하나의 죽음에 필요한 애도의 기간은 얼마일까. 기간이 아니라 총량의 문제일까. 그렇다면 세상에서 고립된 채 살다가 아무도 모르게 죽은 사람의 영혼은 영겁의 시간이 지나도 위로 받지 못하는 걸까.

직업상 매일같이 죽음을 보면서 살고 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죽음에 익숙해지지 말자고 다짐했지만 무참히 실패하고 말았다. 병으로 죽는 사람, 자살한 사람, 교통 사고를 당한 사람, 상해를 입은 사람. 죽음의 이유도, 형태도, 어느 하나 같지 않다. 그리고 나는 이 모든 죽음들을 피부로 느끼며 일하고 있다. 울지는 않는다. 눈물로 그 죽음들을 위로하려 했다면 내 몸 속 모든 물분자들은 눈과 코를 통해 빠져나가 버렸을 테다. 우는 것만이 슬픔은 아니다. 울지 않는다고 슬퍼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런 일을 한 번 한 번 겪을 때마다 아주 가느다랗고 날카로운 모래 폭풍 속에 서 있는 나를 상상한다. 아프지 않았는데, 그저 따끔할 뿐이었는데, 온 몸은 상처투성이가 되어 피가 흐르는 내 모습을. 모든 죽음은 그 죽음을 바라본 모두에게 크든 작든 상처를 남긴다. 커다란 자상일수도, 겉은 멀쩡하지만 안에서 피가 고여 커져가는 둔상일수도, 그저 생채기일수도 있지만, 조용히 지나가는 죽음은 없다.

검은색 패딩, 슬리퍼 한 짝, 주머니에는 립밤과 영수증. 얼마 전 자살한 사람의 유류품의 전부다. 높은 곳에서 뛰어내린 것으로 추정되고, 이름도 나이도 직업도 가족도 무엇 하나 알 수 없는 물건들만 가지고 있었다. 당신의 행적을 조용히 생각해 본다. 어떤 마음으로 그 곳에 올라 간 것인지, 당신은 무슨 일을 했는지, 어떨 때 울고 어떨 때 웃는 사람이었는지,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는지, 마지막의 마지막에 누구에게 어떤 말을 전하고 싶었는지 묻는다. 상상을 하지 않으면 생채기였을 상처가 내 질문들 하나하나에 점점 깊어지고 벌어져 아파 온다. 익숙해지면서 익숙해지지 않기 위한 나의 마지막 발악이다. 죽음 앞에 눈물을 잊은 나에게 주는 벌이다. 곱씹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내가 인간으로서 있을 수 없을 것 같다. 처참한 죽음 앞에 덤덤하게 서 있는 내 모습을 볼 때면 나 자신이 괴물처럼 느껴진다. 질문들이 구체적일수록 깨닫는다. 내가 덤덤할 수 있는 건 이성보다 먼저 작동하는 내 본능 속의 방어 기제 때문이라는 것을. 내가 무의식적으로 나를 보호하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죽음을 마주한 순간 순간에 속마음을 살짝 엿보아 내 안에 안타까움과 슬픔이 안전하게 숨어 있는 것을 나름대로 확인하고 있는 거라고.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내 나름의 애도라고 생각하면서.

일본 가수 ‘아이묭’의 ‘きていたんだよな’라는 곡을 좋아한다. 해석하면 ‘살아 있던 거였구나’ 정도인데, 전혀 모르는 누군가의 자살에 대해 쓴 곡이다. 사실적인 가사, 어쩌면 건조하다고 느껴질지도 모르는 가사지만, 나는 아주 많은 위로를 받았다. 유명 여자 연예인들의 자살 소식들이 이어졌던 시기에, 나 역시 수많은 죽음들 앞에서 어쩌지 못하고 혼자 버둥거리고 있었다. 그 때 이 곡을 참 많이 들었었다. 이유 같은 걸 따져 묻지 않으면서 그저 ‘살아 있었던 거’냐며 외치는 그 목소리에 많이 울었고 아파했었다. 누군가의 자살이 그저 가십으로 소모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다들 궁금해한다.

“왜?”

그리고 그 이유를 두고 또 한참을 이야기한다. 그래도 왜 죽냐며. 그런 건 아무도 알지 못한다. 당사자가 아니면 누구도 대답해줄 수 없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더 이상 이 가십에 말을 얹지 않기로 했다. 그저 마음 속으로 간절히 바랄 뿐이다. 당신이 살았던 모든 날들에 긍정을, 당신의 슬픔이 더 이상은 존재하지 않기를. 그 어떤 것도 아니다. 살아 있던 그 모든 시간이 하나 하나 빛나는 유류품이기에.

눈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건배사를 읊어 본다. 당신이 살았던 모든 흔적들에, 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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