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의궤도 5호
관객의취향에서는 매일매일 글쓰는 모임 '글의궤도'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글의궤도 멤버들의 매일 쓴 글 중 한편을 골라 일주일에 한번씩 소개합니다. 아래의 글은 매일 쓴 글의 일부입니다.
"할머니, 여기. 이걸로 듣는거야."
아영은 미희에게 핸드폰을 건냈다.
"음원사이트 앱인데 이런걸로 요즘엔 음악을 들어. 그러면 이제 할머니 음악도 여기 뜬다는거거든. 검색해서 플레이리스트에 넣어줄게."
미희는 아영이 하는 말의 반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가슴이 뛰었다.
"할머니 음악 다 넣었어. 6곡이나 올라왔네? 그러면 이제 사람들이 이걸 통해서 할머니 음악을 들으면 할머니한테 저작권료가 들어오는거거든? 와 근데 진짜 신기하다. 할머니가 가수였다니."
미희는 손녀앞에서 자신의 과거를 밝히게 된 것이 부끄러웠지만, 30년전 낸 앨범의 음악이 이제라도 돈이 된다니. 그것만으로 이미 든든해졌다. 돈 몇푼이라도 벌수만 있다면 그깟 부끄러움이야 별 일 아니었다.
"그럼 이걸 사람들이 들을 때마다 돈이 들어온다는거지? 얼마나 들어오는거야?"
"근데 할머니 이게 그렇게 큰 돈은 안된다던데. 1번 듣는걸로는 10원도 안되지 아마?"
"10원? 그래도 그게 한푼두푼 모이면 없는 것보단 낫다."
"뭐 그래. 내가 친구들한테 막 홍보할게! 아 할머니 이거 앨범에 사람들이 댓글도 남길 수 있고 그런데. 편지같은거."
"내 노래를 듣고 편지를 남긴다고? 예전에도 내 노래가 인기있는 건 아녔어."
"그래도~ 오늘 올라갔으니까. 며칠있다 또 봐보자~ 나 간다!"
아영은 미희에게 늘 살가운 외손녀이다. 아영이 중3때까지 미희 손으로 키웠다. 미희의 딸이자 아영의 엄마 수정은 늘 바빴다. 미희는 서른 살에 사별로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고 혼자 수정을 키웠다. 미희의 남편은 미희가 가수였던 것을 주변사람들에게 숨기고 싶어했다. 시댁에도 비밀로 했고, 주변 친구들에게도 미희를 잘 소개해주지 않았다. 어차피 가수로서 성공했던 삶도 아니었고, 남편이 싫어하는 일을 계속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 시대의 많은 여자들이 그랬듯 미희는 자신의 욕망보다는 가정의 평화를 지키는 삶을 택했다. 그랬던 남편이 사고로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고, 미희는 홀로 남겨진 수정을 무슨 일이든 잘 키워내야만했다. 미희의 삶은 생존을 위한 전쟁터였다. 안 해본 일이 없었다. 엄마로서 아빠 몫까지 해내는 가장 안전한 보호막이 되고 싶었다. 미희는 고통은 자신이 다 감수해낼테니 수정만은 자신의 삶을 살길 바랬다. 미희의 바램대로 수정은 자신만의 삶을 잘 꾸려나갔다. 일도 결혼도 성공한 삶을 살아냈지만 아영을 낳자 수정의 인생은 미희의 인생처럼 변화하는 듯했다. 미희는 그게 싫었다. 다시 수정이 자신의 삶의 주인공으로 살아가길 바랬다. 미희는 수정에게 아영은 자신이 돌볼테니 다시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라며 바깥으로 떠밀었다. 수정은 내심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엄마가 자신의 짐을 덜어주기를. 그렇게 수정은 다시 바빠졌고, 미희는 아영을 키우느라 바빠졌다.
아영이 고등학생이 되니 미희도 수정도 조금씩 자신의 삶의 여유가 생겼다. 그때, 미희에게로 한 사람이 찾아왔다. 오래된 명반들을 디지털 음원화하는 사업을 시작했다며, 미희의 앨범의 저작권계약을 맺다는 것이었다. 미희는 30년도 더 된 앨범을 어떻게 알고 그가 찾아왔는지 믿을 수가 없었다. 처음엔 사기가 아닐까 의심도 하고 수정에게 도움을 청했다. 수정은 엄마가 가수였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는데 가수였다니. 미희는 장롱 속 깊은 곳에서 꺼낸 앨범 한장을 보여줬다. 얼핏 미희의 얼굴이 옅게 남아있는 젊은 여자가 호리호리한 몸매를 뽐내며 웃고있었다. 미희는 그것이 자신의 앨범이라고 했다. LP로 되어있어 수정의 집에서는 틀어볼 수도 없었다. 아영은 요즘 다시 LP가 유행이라며 자신의 친구의 집에서 LP플레이어를 빌려왔다. 셋은 그렇게 미희의 젊은 시절 목소리를 감상했다. 수정은 이런 상황이 도무지 믿겨지지않았지만 이제라도 저작권료를 받을 수 있고 엄마의 목소리를 자신의 핸드폰으로도 들을 수 있다는 사실에 나쁘지 않겠다며 서류에 사인을 하라고 미희를 부추겼다.
서류에 사인을 받아가고도 3개월간 별 소식이 없더니 이제야 음원사이트에 다음주 공개되니 들어보라는 연락이 왔다. 아영의 도움을 받아 미희는 그렇게 자신의 젊은 날의 앨범을 다시 듣게 된 것이었다. 며칠 후 아영이 요란스럽게 미희의 집으로 찾아왔다.
"할머니, 대박! 할머니 앨범에 팬이 엄청 많았나봐."
"무슨소리야 그게? 나 텔레비도 한 번을 못나갔는데."
"아니 앨범에 댓글이 엄청 달렸어."
'당신의 목소리를 다시 이렇게 들을 수 있는 날이 왔네요. 살아있길 참 잘했다.'
미희의 노래의 댓글에 달린 문장이었다. 미희는 가슴이 일렁거렸다. 살아있길 잘했다니. 지금 미희가 하고 싶은 말을 누가 미리 써논 것만 같았다. 미희는 가수였다. 아니 여전히 가수이다. 미희는 32년만에 처음으로 꿈이란 걸 갖고 싶어졌다. 욕심이란 걸 갖고 싶어졌다.
[관객의취향_취향의모임_글의궤도_ 유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