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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영 Mar 01. 2021

길들지 않을 바람

글의궤도 5호


관객의취향에서는 매일매일 글쓰는 모임 '글의궤도'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글의궤도 멤버들의 매일 쓴 글 중 한편을 골라 일주일에 한번씩 소개합니다. 아래의 글은 매일 쓴 글의 일부입니다.



덕질과 직업이 일치한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순화해 말하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산다는 것은 행복이라는 말이다. 이 '덕업일치'라는 말이 생겨난 것은 아마도 좋아하는 일을 (충분한 이익을 창출해내는) 생계의 수단으로 삼는 것이 어려워 많은 사람들의 염원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진리처럼 내려오는 '전공 살려서 취직하는 사람 없다'는 선배들의 말은 지금의 나와 다수의 동기들에 의해 증명되었고, 수많은 후배들 역시 현실에 끝끝내 타협하여 같은 길로 슬프지만 오게 될 것이다.


예전에 한창 과외순이로 살던 시절, S대를 나와 대기업 과장에까지 역임하시던 학생 어머니께서 (사족이지만 이 어머님께서는 학벌과 직업뿐만 아니라 미모와 성품, 재력과 요리 솜씨에 화술까지, 뛰어나지 않은 부분이 거의 없으신 분이었다) 늘 하시던 말씀. "선생님, 결혼하지 마세요. 그래도 하실 거라면 아들 낳지 마시고요, 의사 만나서 편하게 사세요."

다 갖추신 분께서 이런 세속적이고도 진부한 말씀을 하시다니. 꽤나 충격적이었지만 마음을 가다듬고 존경의 의미(진짜였다)를 담아 말을 꺼냈다.

"어머님보고 늘 대단하시다고 생각했어요. 좋은 대학도 나오시고 좋은 회사도 다니시는데 일도 잘하시고 살림에 교육까지... 정말 멋있으시고 진짜 '커리어우먼' 같으세요!"

말하는 내내 낯간지럽긴 했지만 그녀에 대해 내가 느끼는 바 그대로였다. 그러나 돌아온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어휴, 선생님. 직업으로 자아실현하는 거 아니에요."


대충 웃으면서 집을 나섰지만, 돌아선 순간부터 지금까지, 학생 어머니의 마지막 그 답변은 머릿속에 문신처럼 새겨져 바래지도 못하고 있다. 그래서 하고 있는 일에 스트레스나 회의감이 느껴질 때면 꼭 수면 위로 올라와 '그래, 직업으로 자아실현하는 거 아니랬어' 하고 합리화를 해주고는 사라진다.


그러면 자아실현은, 대체 어디서 하는 거지?


돈을 벌어야 일상의 욕구(라고 적지만 사실상 정신병에 걸리지 않기 위한 생존의 욕구, 몸부림에 가깝다)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전공과 관련이 없되 안정성은 기가 막히게 보장해 주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곳에서 하는 일은 기막히게 무의미했다. 내가 하는 일은 '생산'보다는 뒤치다꺼리에 가까웠다. 생계를 유지시켜준다는 것 외에는 의미를 찾기 힘들었다. 스물, 스물한 살 때 저버린 수능 점수나 가, 나, 다군의 응시 원서를 이제 와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다른 곳을 찾아야 했다. 날아오르기 위해선 여기가 아닌 다른 활주로, 나만의 비행장을 찾아야 했다.


비행장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벅차게 했다. 설계의 초안도 끝나지 않았지만 몇천 번은 날아오른 것처럼 마음을 들뜨게 했다. 희망을 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즐거울 수 있구나, 판도라의 상자에 괜히 남은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렇게 차차 바람이 들어갔고, 이러다 언젠가는 정말 떠오르는 거 아냐? 하는 허무맹랑한 자기주문 또는 헛된 기대에 자주 사로잡혔다.


그리하여 적어보는 길들지 않을 바람, 나의 야망은 다음과 같다.

(시작은 겸손해야 하니까) 책을 가능한 한 많이 읽는 것. 그래서 맑고도 멋진 것들로 물들고, 책의 바다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는 것. 세상의 어떤 풍파로부터도 나를 지켜 줄 동반자를 만나는 것. 그래서 그곳으로 함께 가는 것. 그러다 나 혼자서도 갈 수 있게 되고, 나 자신은 홀로여도 아무렇지 않음을, 괜찮음을 알게 되는 것.

그리고 그러한 책을 직접 써 보는 것. 그래서 기댈 곳 없이 아픈 사람들이 마음껏 붙잡고 울고, 안기고, 자신의 슬픔을 페이지마다 묻혀서 결국은 조금 더 가벼워진 마음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되는 것.

잊히지 않아야 할 사람들의 이름을 길이길이 남도록 돕는 것. 세상이 가로로 넓어지도록, 수직이 아닌 수평의 힘을 믿고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건네는 것. 그래서 누구 하나 해치지 않게 되는 건강한 사회와 환경을 만드는 것.


너무 원대한가? 사실 이런 우스운 야망도 있다.

조금의 유명세를 얻으면 소셜미디어를 통해 질문을 받는 것. 고심하며 답하느라 결국엔 밤을 새버리는 것.

날 함부로 했던 이들이 다시 알은체를 하면 최고의 복수를 하는 것. 가장 무신경한 얼굴로 복수하지 않는 것, 무시하는 것.

조금의 재력을 얻으면  해가 넉넉히 비치고 앞으로는 푸른 바다와 뒤로는 능선이 보이는 집을 얻어 사랑하는 사람들을 초대하는 것.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고 그 앞에서 보탬이 되는 즐거운 대화를 나누는 것. 가끔은 그들을 재워주며 이른 아침 울리는 새 소리에 맑은 정신으로 일어나는 것. 뒤늦게 일어난 그들을 웃음으로 맞이하는 것.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오랫동안 함께하는 것. 자상하고, 반듯하고, 현명하고 지혜로우며 베풀 줄 알고, 몸과 마음이 건강한 것도 모자라 조금 훤칠하고 깔끔하고 센스는 부족하지 않게 있고, 유머 코드는 퍼즐 조각처럼 맞아 무슨 말만 해도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랩을 해도 되겠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존중과 이해와 공감이 몸에 배여 있고 항상 고운 말만 해서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 나날이 다짐하게 되는 것.

-가장 중요하지만 가장 어렵고 난해한 바람일 것이다. 이런 사람은 세상에 '한 명' 없으니까.


이것이 나의 길들지 않는 바람이자 야망들이다. 언제 모두 이룰 수 있을지, 다 이룰 수 있기는 한 건지(아마 아닐 확률이 높겠지만)는 모르겠지만 다가가고 성취하려는 과정만으로도 충분한 의미를 만들어 낼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이를테면 시시한 직업에서는 절대 찾을 수 없는, '나'를 발견하게 되는 것 말이다.


[관객의취향_취향의모임_글의궤도_ 서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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