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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영 May 14. 2021

앤디워홀과 복제

글의궤도 3기

모든 것은 스스로를 반복한다. 모든 것은 반복일 뿐인데 사람들이 새로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놀랍다.


앤디 워홀


앤디워홀展에서 가장 인상깊게 보았던 문구이다. 앤디 워홀의 이러한 철학은 그의 예술 창작 기법에서도 포착할 수 있다. 그는 실크스크린 기법을 주로 사용하여 작품을 창작했다. 이 기법은 스텐실의 일종으로서 하나의 틀을 만들어 두고 그 틀을 반복하면서 똑같은 상의 작품을 무한히 생산해내는 기법이다. 3관에서는 특히 실크스크린 기법의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폴라로이드로 찍은 사진과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그려진 초상이 잔뜩 전시되어 있었는데, 눈 앞에 두고도 사진과 그림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실크스크린은 ‘반복’을 멋지게 구현해냈다. 4관에서는 마오쩌둥의 초상화들을 보며 발견한 한 가지 놀라운 점은, 그 어디에도 원본이 없다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그 그림은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만들어졌으므로 원형의 틀이 있다. 하지만 그것을 원본이라고 할 수 있느냐 묻는다면 나는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마오쩌둥의 외모를 본 따서 그린 초상화이므로 그 그림의 원본은 마오쩌둥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앤디 워홀이 마오쩌둥을 직접 보고 실크스크린을 제작했을까? 아니다. 작품의 원본이 되는 사진은 마오쩌둥의 아주 유명한 사진이므로 앤디워홀은 마오쩌둥의 실물을 보고 제작하지 않았다. 앞의 문장에서는 원본이라고 칭하긴 했지만, 유의해야 한다. 그 사진조차도 원본이 아니다. 그저 마오쩌둥이라는 사람의 모상일 뿐이다. 나는 이 사실이 충격적일 만큼 놀라웠는데 일련의 생각을 통해 곧바로 ‘모든 것이 반복’이라는 표현을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마오쩌둥의 복제인 사진과 그 사진을 복제한 실크스크린, 그리고 그 실크스크린을 통해 복제된. 반복의 반복의 반복인 그림을 보며 사람들은 무엇이 원본이고 무엇이 가품인지를 가려내고 있다. 물론 앤디 워홀 본인이 제작한 그림은 진품으로서의 의미가 있지만, 나는 이미 원본이 퇴색된 세상에서 원본과 복제품 혹은 모조품을 구분하는 것이 조금은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했다.


종종 세상이 허구라는 생각을 한다. 앤디 워홀이 이 세상을 반복과 복제의 관점에서 보았듯이, 나는 사실을 의심한다. 사실은 없다고 생각한다. 오로지 사건만이 있을 뿐. 사람들은 같은 사건을 두고도 각자에게 중요한 정보만을 취사선택하여 인식하게 되어있다고 생각한다. 어디에도 객관은 없고 주관만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세상에 원본이 있을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사람들이 진짜라고 믿는 많은 정보들도 결국엔 각 개인들로부터 편집된, 진실의 모조품에 불과하다. 마치 실크스크린처럼, 사람들은 원본을 두고 각자의 색깔을 덧입혀서 각자의 그림을 내놓는 것이다. 물론 마오쩌둥의 초상과 같이 애초부터 원본이란 없었을 수도 있다. 사람들이 원본이라고 믿는 ‘그것’조차도 사진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그 모든 정보들이 유의미하다고 믿는다. 무언가의 복제일지라도 앤디워홀의 그림이 ‘원본’으로서 높은 값에 팔리는 것처럼, 그 모든 사건들은 사람들의 인식과 재구성 과정을 거치면서 사실로서의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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