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회사 생활 10년 차의 38살 여자이다. 대부분이 그러하듯 이 나이 때쯤 되면 안정적인 회사와 가정을 기대하게 된다. 나 역시도 이 나이쯤에는 안정적인 직장과 사랑하는 남자와의 가정을 꾸리게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어디 인생이 마음대로 되던가.. 회사에 흉흉한 소문이 돌았을 때만 해도 경제 상황 악화로 그냥 넘어가는 미풍일 줄 알았는데 이게 점점 태풍이 된 것이다. 급기야 회사의 뿌리가 출렁이더니 회사가 망했다.
10년 넘는 시간 동안 욕하면서도 다니던 애증의 회사였는데 내가 그렇게 욕할 때는 망하지도 않더니 이제 좀 다닐 만 해지니까 이런 일이 나에게 닥쳤다.
아무 이유도 모르고 갑자기 내 집에서 쫓겨난 느낌이랄까..
한 줄기 희망 같던 회생마저 뜻대로 되지 않았고 6개월이란 시간을 진짜 악착같이 버텼지만 결국에는 퇴직금도 받지 못한 채 회사와 작별을 했다.
그래도 꽤 잘 나가던 곳에서 10년간 다니면서 안정적인 미래를 꿈꾸었기에 나에게 실업은 뉴스에나 나오는 남에게만 일어나는 머나먼 얘기였건만 내 현실이 되었다.
언제나 그렇듯 불행은 어느 날 말도 없이 찾아오고 내 실업도 정말 아무 준비 없이 갑자기 찾아왔다.
다행인 듯 불행인데 다행 같은 너
상처는 생각보다 깊었지만 산 사람은 살아진다고 밥도 먹도 잠도 자고 살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취업준비를 시작하게 되었다.
마음을 추스르는 일이 쉽지 않았고 밤에 자다가도 너무 억울한 일들이 생각나서 벌떡 일어났지만 그래도 꾸역꾸역 취업 준비를 했다.
불행 중 다행인 건 최악의 경제여건과 코로나 19에도 나를 필요로 하는 회사가 있어서 취업을 하게 되었다. 연봉도 전하고 엇비슷하고 일하는 것도 직종은 다르나 하는 일은 비슷해 보였다.
그런데 취준생이라면 다들 알겠지만 이력서란 그동안의 경력과 장점을 최대한 뻥튀기한 질소 과자 같은 것이다. 나 또한 10년의 경력사항과 내 장점을 최대한 부풀렸고 이력서 한 줄 한 줄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 이력서를 본 사람들은 나를 그런 사람이라고 믿고 뽑았고 그렇게 일할 것이라고 착각을 하기 시작했다.
회사 초반 센스 있고 빠릿빠릿하고 만능인 마치 미생의 안영희 같은 캐릭터를 기대했던 회사 분들은 점점 내 실체를 알아가기 시작했고 나에게 실망하는 눈초리가 팍팍 느껴졌다.
기대감을 잔뜩 부풀렸기에 풍선처럼 터진 기대감은 쪼글쪼글해졌고 나는 회사에서 쭈구리가 되었다. 아는 것도 버벅거리고 모르는 건 더 버벅거리면서 현실의 벽이 높음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사실 나는 이 회사를 약간 쉽게 봤었다. 이 전의 회사가 큰 규모이기도 했고, 이 정도 규모의 회사는 충분히 편하게 다닐 수 있을 거라는 착각을 했었다.
취준생 시절 고정비는 있는데 수입이 없으니 답답한 마음에 여기라도 일단 다녀보자 그랬다. 그렇게 허술하게 마음을 먹은 대가인가.. 세상에 쉬운 일은 없었다.
회사마다 룰이 존재하겠지만 이곳의 룰은 좀 달랐다. 이전 회사는 내 일만 딱딱하면 되는 개인적인 느낌이 강한 곳이라면 이 회사는 그에 비해 매우 가족적이다. 임원진의 식사도 챙겨야 하고 잡다한 업무의 양도 많고 내 일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일도 알고 있어서 부재 시 누구나 처리할 수 있어야 한다.
일을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데 점점 초심이 사라진다. 옛날 회사와 현재의 회사를 계속 비교하면서 내가 이런 것까지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괴롭힌다.
불혹의 막내
사실 38살 정도의 나이면 꼰대와 청년의 중간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정도 회사에서 인정받는 나이이고 신입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꼰대도 아닌 약간은 애매한 나이이다.
그런 내가 38살 불혹을 2년 앞둔 나이에 다시 막내가 되었다. 사실 막내였던 적이 언제인지도 기억나지 않는 내가 막내 생활을 시작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그것도 나와 나이 차이도 얼마 나지 않는 상사 밑에서 막내 역할을 하는 것은 더더욱이 쉽지 않다. 막내 생활을 하면서 느낀 거지만 세상의 많은 막내들은 정말 힘들다. 상사가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눈치도 봐야 하고 적당한 센스도 작동해야 하며 약간의 분위기 메이커 역할도 해야 한다.
더욱이 상사들이 하기 싫은 각종 잡일들은 모두 막내의 차지이다. 더욱이 상사와 나이차라도 많이 나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나이 차이도 얼마 나지 않으니 자존심에 매일 스크래치를 입는 느낌이다.
이런 상황에서 막내 탑재 오작동으로 몸과 마음이 따라주지 않으니.. 다들 말은 안 하지만 점점 나는 회사 분들에게 눈치 없는 사람, 답답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이렇게 짠 내 나는 막내 생활을 다시 하게 될 줄 정말 몰랐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럭저럭 살고 있다. 일주일에 한두 번 친구도 만나 그들의 에너지도 받고, 글 쓰는 소소한 기쁨도 느끼는 중이다. 비록 이 나이에 막내가 되었고 아직 남자 친구도 없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지만 아직 그런대로 살고 있다.
물론 가끔씩 상황을 비관하는 날도 있을 것이고 회사와 상황에 대한 불만을 가지는 날들도 있을 것이다. 옛날 같은 날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기에 계속 포기해야 하는 것들도 생길 것이다.
분명 그 속에서 퇴사냐 계속 다니느냐를 고민하면서 결정 내리지 못하는 내 모습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처럼 잘 참고 이겨내며 그럭저럭 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