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담과 여행
셋째 날.
알람도 없이 잠에서 깼다. 여섯시였다. 어제는 무서워서 일찍부터 누워있었더니 오늘이 길어져버렸다. 어제 다섯페이지도 넘기지 못한 책을 다시 펼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낯선 소리가 들려왔다. 이 집에서 두 밤이나 보내면서 처음듣는 사람 말소리였다. 문에 붙은 짧똥한 커튼으로 가려진 가로로 길게 난 창이 바깥을 연결해주는 중요한 장치로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몇 명의 사람들이 삽을 들고 나무로 된 어설픈 담장을 넘어뜨리려 하고 있었다. 이것저것 던지고 부수고 있으니 주인인가. 그렇다면 저 사람들은 내가 여기 머물고 있는 걸 알고 있을 텐데. 혹시 아는 체하러 오려나. 인사할 준비를 해야 하나 걱정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문에 붙어 조금 구경하다 다시 책을 폈는데 문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소리가 거슬리기 시작했다. 나만 빼고 이루어지는 사람들의 소통은 소음이 되어갔고 땅을 쿵쿵대면 작은 집 안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나만 살아남든 듯한 고요함이 무서웠는데 지금은 문 바깥에 사람들이 할 일을 마치고 어서 가버리기를 바란다. 나도 참 단단히 삐뚤어졌다.
시장에 다녀왔다. 신기하게도 시장에 들어가자마자 분위기가 달라져서 잠깐 다른 세상에 다녀온 것 같다. 그곳의 분주한 사람들 사이에서 나도 바쁘게 움직이고 나니 점심으로 먹은 샌드위치가 벌써 소화된 것 같다. 오징어순대로 저녁해야지.
저녁엔 친구들과 영상통화를 했다. 낮에 시장에서 사 온 것들을 저녁으로 먹으며 친구들과 그동안의 일들을 나눴고(물론 내 이야기는 하지 못했다.) 다음 휴일엔 꼭 만나기로 약속했다. 이젠 각자의 일에 치여 시간을 맞추는 것도 쉽지 않게 되었지만 그것 또한 우리에겐 좋은 일이었다. 일이 없어 빈둥대며 불안해하던 서로의 지난날을 알고 있기 때문에 시간을 쉽게 내주지 않는 친구에게 불평할 수가 없다. 우리가 바쁘게 일할 수 있음이 기쁘다. 그래도 다음 휴일엔 보고 싶다.
노을과 밤바다보기는 또 내일로 미뤄져 이것 또한 이 여행에 내가 스스로 심어둔 부담일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