쫄지 않는 아이, 쫄지 않는 길 위의 청년

길위의청년학교 5기 임현아

by 길위의청년학교

1. 예수재활원에서 찾은 나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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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어린 아이들을 좋아하고, 유치원 교사인 터울이 큰 언니를 보며 자연스럽게 유치원교사의 꿈을 키우며 살아왔던 나에게 처음 “사회복지사”라는 직업을 알게 된 계기는 청소년부 수련회에서 방문하게 된 예수재활원에서였다.

장애인생활시설인 예수재활원에서의 장애인들과 첫 만남부터 2박 3일간의 수련회 일정은 나에게 너무나 낯설음,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회복지사 선생님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의 편견과 색안경이 벗겨지고 “사회복지사 참 멋진 직업이구나. 사회복지사에 대해 알아보고 싶다”라는 마음이 생겼다. 그 이후 나의 삶은 사회복지사로 화살표가 정해졌다.


2. 나의 청소년기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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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청소년기는 특별한 이벤트 없이 무난했다. 딱히 사춘기의 시기를 보낸 기억도 없는 걸 보니 조용히 지난 것 같았다(이건 엄마가 말해줘야 정확하겠지).


첫 번째 키워드는 “공부”다. 중학교 때까지는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부모님이 나에게 “공부하라”는 말을 하신 기억도 없다. 나는 정말 동네에서 친구들과 실컷 놀고 또 놀았다. 그렇게 놀고 놀았던 결과물로 고등학교 진학에 어려움이 눈앞에 다가왔다. 인문계는 당연하고, 시내권에 있는 실업계 고등학교에도 진학을 못 할 위기였다. 중3 담임선생님의 노력으로 같은 재단의 실업계고등학교에 겨우 입학했다.


반에서 35명 중에 나는 33등이었다. 내 뒤에 운동부 친구들밖에 없었다. 이 지경이 되어서도 나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못 했다. 그러다 첫 번째 중간고사에서 27등을 했다. 그때까지 내 인생을 통틀어 이렇게 좋은 성적을 받아본 적은 처음이었다. ‘공부를 안 했는데도 이런 성적을 받다니!’라는 마음이 들면서 나의 자존감은 폭발했다. 공부에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고, 내 성적은 점점 올라갔다.


내가 특히 잘했던 과목은 국어와 수학이었다. 국어는 내가 정말 좋아했던 총각 선생님이셨기 때문에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열심히 하게 되었고, 수학은 너무 싫어했던 수학선생님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주고 싶은 마음에 열심히 하게 되었다(수학 전교 1등까지 하고 정말 선생님의 코를 눌러주었다).


두 번째 키워드는 “교회 청소년부”이다. 청소년부를 이끌어주시던 목사님께서는 원래 선교사의 꿈을 품고 필리핀에서 오랫동안 선교사로 일하셨던 분이셨다. 목사님께서는 우리 청소년들이 어디에서든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시면서 해외선교를 많이 데리고 다니셨다. 4년에 한 번씩 가는 해외선교가 그저 해외여행이 아닌 선교사의 마인드로 나갈 수 있도록 많은 훈련을 시키셨다.


해외선교를 나가기 전에 자금을 모으는 활동(일일찻집, 세차, 과일판매 등등)부터 우리가 가는 그 지역의 지리를 익히기 위해 미리 공부하고, 현지에서 가이드나 목사님 없이 우리끼리 팀을 이뤄 미션을 수행하고 전도활동을 하고 숙소로 돌아오는 활동도 했다. 현지인들을 초청하는 전도잔치에서 선보일 활동들도 직접 계획하게 하셨다. 해외선교를 통해 영어공부도 자연스럽게 하게 되었고, 자주성도 기를 수 있는 뜻깊은 시간이 아직도 나의 머릿속에 생생히 기억에 남아있다(당시에 불렀던 영어찬양과 따갈로그 찬양들이 아직도 흥얼거리며 기억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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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 마음먹고 공부한 결과로 국립대학교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하게 되었다(하지만 나의 장학금은 그때 이후에는 없었다.....).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한 캠퍼스의 모든 활동이 즐거웠다. 사실 아주 작은 시골캠퍼스라서 TV에서 보던 캠퍼스의 느낌과는 달랐지만 강의실, 학식, MT.. 모든 것이 새롭고 재미있었다.


나를 유난히 예뻐하던 선배언니의 권유로 단과대학 임원을 하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앞에 나서고, 주도하고, 이끌어가는 걸 좋아하던 나의 성향과 딱 맞는 일이었다. 그렇게 2-3학년 내내 단과대학에서 활동을 하며 축제 계획, 각종 이벤트들을 준비하며 즐겁게 보냈다.


대학교 4학년 때는 조금 더 넓은 곳에서 활동해보자며 총학생회 제안을 받았다. 3학년 2학기 때 집중적으로 총학생회 선거운동을 하며 2개의 캠퍼스를 돌아다니며 밤낮없이 선거운동을 하며 다녔다. 당선된 이후에 단과대학에서보다 더 규모가 크고, 많은 활동들을 하면서 쉴 새 없이 나의 역량을 발휘하고 다닐 수 있음에 너무 기뻤다. 그렇게 나의 가장 예쁘고 아름답던 반짝반짝 빛나는 대학 생활은 학생회로 시작해서 학생회로 마무리가 되었다.


4. 관계중심의 지역복지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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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이후에 여러 분야의 사회복지 현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노인복지, 장애인인권, 사회복지사협회. 여러 활동을 통해 내가 살아있음을, 그리고 사회복지사임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을 보내왔다.


그러던 중 결혼과 동시에 나의 경력은 그렇게 5년 동안 단절되었다. 그리고 재작년 다시 연결되었다. 그동안의 경단으로 인해 다시 사회 초년생이 된 것 같은 어색함과 떨어진 자신감이 두려움이 되어 기쁘지만은 않았다. 나의 큰 장점이라고 생각했던 빠른 일처리로 그 두려움을 떨치고자 열심히 애썼다. 나에게 맡겨진 사업은 나 혼자 머리를 싸매고 끙끙거리면서도 부족함 없이 하려고 애쓰고, 아이들과 함께 하는 프로그램은 내가 계획하고, 계획한대로 잘 흘러가고자 의도하며 진행했고, 모든 일들은 착착착 잘 되어가는 듯 보였다.


그러던 중 교사교육으로 함께 “복지요결”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고 그 안에서 우리 기관의 비전이자 핵심가치인 자주, 공생, 선험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실적을 내기 위해 프로그램을 내가 준비하고, 계획하고, 의도한 활동에 아이들이 “참가“하는 것이 아닌 묻고, 의논하고, 부탁하는 과정을 통해 아이들이 직접 계획하고, 준비하고, 진행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참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맡은 업무가 나 혼자 하는 일이 아니라 모든 교사가 함께 고민하고, 함께 하는 일(공동체)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관계중심, 관계우선의 삶을 배우고 알아갈 수 있었다.


현재 나는 모두학교라는 복지관 내 마을 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온몸으로 부대끼며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단단하고 든든하고 넉넉한 마을”을 만들고, “쫄지 않는 아이”로 자라게 하려고 모인 부모님들과 공동양육을 하며 아이들을 키우고 있다. 여전히 아이들에게 묻고, 의논하고, 부탁하는 일들을 하고 있다.


이 곳에서 일하면서 나는 기존에 나의 중심대로 일하던 ‘사회복지사’가 아닌 지역의 주민들(나에게는 아동, 청소년)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지역복지활동가’로서의 정체성을 찾게 되었다. 일방적으로 아낌없이 주는 나무 같은 복지사가 아닌 서로 주고받는 관계 속에 살아가는 활동가로 사람들과 직접 만나고 지금처럼 계속 부대끼며 살아갈 것이다.


지금도 초등 아이들을 위주로 만나고 있고, 그동안 청소년 분야에서는 일해보지 않아 청소년을 만나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지금도 쉽지 않다. 이 쉽지 않은 일을 나는 더 열심히 해보고 싶다. 내가 배우고 익히고 살아가고 있는 관계중심의 삶을 아이들에게도 적용하여 모두학교의 아동, 청소년들이 자주성 있는 아이들로 자랄 수 있도록 돕고 싶다. 길위의청년학교를 통해 청소년에 대해 많이 이해하고 배울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었고, 많은 선생님들과 이야기를 하며 배우는 것이 너무나 설레는 일이다. 수많은 길 위에 청년들과 함께 청소년들을 위한 기반을 만들고, 청소년들이 이끌어가고 그들이 주인이 될 세상을 만들어 나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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