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무지와 욕망의 세계에서 끌어올려준 현대의 철학자, 그를 돌아보다.
"노인들이 저 모양이라는 걸 잘 봐 둬라. 너희들이 저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채현국 선생은 과거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본인을 포함한 노인들을 향해 거침없이 일갈하며 세상에 알려졌다. 물론 행적을 보면 선생께선 결코 조용히 살아갈 수 없는 운명이셨지만, 어쨌든 재야에 묻혀 고독한 방랑자로 살아가길 바라던 그의 바람은 그렇게 실패로 돌아갔다.
채현국 선생은 1935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한 후 PD가 된 그는 권력의 나팔수가 싫어 이를 과감히 때려치우고 '흥국탄광'을 운영했다. 덕분에 그는 거부가 되었고, 이로 인해 탄광을 떠나게 되었다. 그는 직원들에게 퇴직금의 3배를 나눠주며 "나눠준 게 아니라 돌려준 것"이라 표현했다. 현재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정경유착이 훨씬 쉬웠던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면 그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금세 알 수 있다. 결국 그는 권력의 앞잡이와, 돈 버는 맛에 중독되는 본인이 싫어 자유인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군사정권 시절에는 그가 민주화 인사들에게 집과 자금을 내주었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다. 몇 년 전, 자유한국당 모 의원을 만나 뵈었을 때의 일이다. 나는 그가 채현국 선생과 통화하는 내내 시종일관 겸손했던 모습을 목격했다. 이를 통해 진보와 보수, 즉 정치적 성향을 떠나 많은 사람들이 '인간' 채현국을 따른다는 사실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아주 오래전, 나는 아버지께서 어떤 할아버지에게 쩔쩔매는 모습을 목격했다. 멀리서 풍채만 보면 그저 키 작은할아버지 같았기에 나는 의문이었다. 알고 보니 그 할아버지가 채현국 선생이었다. 그렇게 영원한 멘토와의 첫 만남이 시작되었다.
평소 채현국 선생께서는 난해한 말씀들을 많이 하셨다. 특히나 과거엔 내가 철학에 대해 부정적이었기에 때로는 거부감까지 들었다. 그랬던 내가 철학에 빠지고 나니 나의 무지에서 나온 오만이 부끄러워졌다. 돌이켜봐도 잘했다고 생각하는 사실 중 하나는, 당시 선생의 말씀들을 이해하지도 못한 채로 열심히 받아 적었다는 것이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던 그의 말씀들이 시간이 흐르며 하나씩 피와 살처럼 와 닿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당시 선생께선 여느 꼰대들처럼 생각을 강요하시지 않았다. 마치 '물 흐르듯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 나의 말을 이해하게 될지어다'라는 뉘앙스였다. 선생에겐 그런 확신이 있었으니 나에게 별다른 강요를 하지 않으셨던 것 아닐까. 요새 열심히 침 튀겨가며 공허한 본인의 이념을 설파하려는 수많은 사람들과 정확히 대비되는 모습이다. ㅡ물론 나 또한 이에 포함될 것이다ㅡ 이것이 과거 '건달 할배, 채현국 선생'이라는 어설픈 글을 남기고도, 다시금 선생에 대해 다루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언젠가는 채현국 선생을 만나 뵈러 양산으로 내려간 적이 있었다. 선생께선 나를 보자마자 "나 같은 사람 보려고 먼 길 안 오셔도 됩니다. 지나가다가 들리시는 거도 아니고 제가 뭐라고 여기까지 내려오십니까."라며 반겨주셨다. 오히려 하이에나처럼 남들에게 훈수를 두려고 여기저기 찾아다니는 사람들과도 명확히 비교되는 순간이었다.
당시 선생께서는 반주를 하자며 인근 술집으로 나를 데려가셨다. 그리고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어록들을 남겨주셨다. 인생의 성공에 대해 여쭙자 "성공의 반대는 실패가 아닌 포기입니다. 포기만 안 하면 모든 건 다 해결됩니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격하게 공감했다. 이어 "살면서 힘든 육체노동을 3달 정도만이라도 꼭 해보라"는 말씀도 덧붙이셨다. 이러한 경험을 한 번쯤 해봐야 살면서 어지간한 일로는 귀찮고 힘들다는 생각을 안 할 거라는 이유였다.
이 또한 맞는 말씀이었다. 과거 나는 아버지의 사업을 도와 평일마다 강원도 공장을 출퇴근하며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통받았던 기억이 있다. 당시 경험 덕분에 이후로 나는 '어지간한 고통은 고통으로도 느껴지지도 않는 강한 멘탈(?)'을 소유하게 되었다. 문득 최근에야 깊이 와 닿은 말씀이 하나 떠오른다.
"기운신 장사도 죽을 맛이란 걸 모르고 기운 없는 사람들은 본인만 그런 줄 안다. 기운신도 죽을 맛인데 창피하기도 해서 강한 척한다는 걸 사람들은 잘 모른다."
아무래도 사람 만나는 것이 일이기도 한 나는 주위 수많은 기운신들을 만나봤다. 처음에 본 그들은 전부 강해 보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모든 것은 허상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들의 '허세'는 마치 사막의 신기루와도 같았고 어느 순간 각자 다른 이유로 소멸되는 모습들을 자주 봤다.
이 시대에 진정한 기운신은 극히 드물다고 생각한다. 이 경지에 도달하기엔 고통과 아픔이 필연적으로 따른다. 이러한 고통 없이 삶에 대해 논하는 사람들은 그저 <아프니까 청춘이다>의 김난도 씨의 아류에 불과하다고 느낀다.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채현국 선생은 이 시대에 보기 드문 기운신이다. 실제로 인사동 낭인들의 활빈당주, 가두의 철학자, 당대의 기인이라는 수식어들이 그를 따라다닌다. 특히나 내가 선생에게 더 애착이 가는 이유는 아마 '오척단구 거한'이라는 수식 때문은 아닐까.
정작 채현국 선생께서는 이러한 글들을 무척 꺼려하신다. 그럼에도 나는 용기를 내어 이 글을 쓴다. 부조리한 세상에 저항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작은 용기라도 건네기 위함이다.
"우린 옳다, 그르다로 살고 있습니다. 이런 것도 주장이 아니고 증명입니다
말만 주장같이 들리지 절대로 옳다, 그르다는 없습니다.
있다고 하면 우리 인류 전체의 합의가 된 기준일 뿐이지 실제로 옳다 그르다가 있는 게 아닙니다
합의 이외에는 옳다, 그르다는 절대 없으니 기죽지 말고 삽시다.
옳다, 그르다는 힘 있는 사람들이 우리를 저항 못하게 하려고 써먹는 제일의 무기입니다."
여전히 돈과 권력으로 모든 걸 지배하려는 이들이 나의 주위에도 많이 존재한다. 하지만 돈과 권력만으로는 결코 진심 어린 존경을 얻어내진 못한다. 그들을 볼 때마다 채현국 선생이 그리워지는 이유는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