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고 피폐해진 영혼을 깨우려거든,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오늘 낮, 오랜만에 열암 송정희 선생님을 만나 뵈었다.
작년 겨울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뵌 후로 몇 달만이었다.
“청도, 오랜만이여. 잘 지내고 있지?”
열암 선생께서는 나를 볼 때마다 직접 내려주신 호인 ‘청도’로 불러주신다.
“예.. 요새 재미있게 잘 살고 있습니다.”
애써 웃음을 지으며 밝은 척해봤지만 속마음을 숨길 수는 없었나 보다.
그도 그럴 것이 장례식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덤덤했던 내가
열암 선생님을 보자마자 미친 듯이 오열했기 때문이다.
당시 염으로 인해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왔는데
친한 형이 열암 선생님께서 오셨다는 말을 전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상주는 절대 빈소를 벗어나면 안 된다’는 원칙까지 어기고 밖으로 부리나케 달려 나갔다.
행여라도 집에 돌아가셨을까 봐.
다행히 복도 끝을 지나자 선생님을 발견할 수 있었고,
품에 안기자마자 다리에 힘이 쫙 풀린 나는 그 자리에서 서글프게 울었다.
복도가 떠나가도록 실컷 울고 또 울어도 슬픔이 도저히 떠나가질 않았다.
아버지의 육체는 이미 떠났지만, 선생님과의 소중한 추억만큼은
여전히 이 땅에 머물러 있다는 생각이 들어 순간 아버지의 모습이 오버랩이 되었기에.
그런 나를 보셨기에 선생님께선 아무리 내가 지금 웃어 보여도
속은 이미 무너져 있을 것이란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다.
그런 내가 안쓰러웠는지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청도,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해. 비록 아버지가 회갑은 못 쇠고 가셨지만 주위를 보면 4,50년도 못 살고 떠나는 사람들도 많어. 매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이 순간을 이겨낼 수 있어. 가령 아버지께서 100세까지 살지 못했으니 나는 ‘평소에 건강 관리를 잘해야지’라는 식으로 감사하게 생각하는 자세가 필요한 거여.”
뜨끔했다.
실제로 나는 주위 연세가 지긋하게 드신 어르신들을 볼 때마다 매번 ‘부럽다’는 생각뿐이었다
심지어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얼마나 살다가 가셨는지 나이를 계산해보는 이상한 병(?)도 생겨났다
나처럼 억장이 무너지는 경험을 해본 사람은 아마 공감할지도 모르지만 사실 아무 의미 없는 행위였다.
아무리 남들과 비교해봤자 아무 의미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았지만
달라지는 현실은 아무것도 없고 오히려 그럴수록 나만 비참해진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았지만,
나는 도저히 그 이상한 집착을 멈출 수가 없었다.
열암 선생님께선 그런 나에게 보란 듯이 알맞은 조언을 해주셨다.
돌이켜보면 아버지께서 회갑을 쇠진 못 하셨지만,
57년이라는 세월이 짧으면 짧고 길면 정말 길다.
결국 내가 어떻게 마음먹느냐에 따라 달린 57년이라는 아버지의 세월.
이를 보면 부, 명예, 사랑 등도 전부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들이 ‘로또 한 번만 당첨되면 평생 감사하면서 살 텐데’라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는 옛 말처럼 무엇을 가지게 되면
주위에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하며 결국 끝없는 욕망을 낳게 된다.
그렇기에 나에게 있어 열암 선생님의 조언은
단순한 위로가 아닌, 무척 값지고 소중한 '인생의 조언'이었다.
언젠가 누구나 반드시 겪게 될 이 고통을
이 세상에서 나만 겪는 특별한 경험이 아닌 수난을
어떻게 견뎌내야 할지 몸소 느끼고 배워가는 중이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결국 모든 것은 더 나은 사람들과 비교하다보면 스스로의 영혼을 갉아먹지만,
매사에 감사할 줄 아는 마음으로 살면 피폐해진 영혼도 어느 순간 깨어난다.
인생의 방향을 잃고 방황할 때 바로 잡아줄 수많은 멘토들과
때때로 깊은 우울에 빠진 나를 위로해주는 친구들과
게다가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의 정신까지 곁에 있기에
이미 나는 너무도 감사한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뻔하디 뻔한 말을 너무나도 싫어했던 내가,
절대 그런 뻔한 길로는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내가,
결국 돌고 돌아 이 뻔한 종착점에 도달했다.
감사할 줄 아는 마음.
혹여 다른 방도가 있다고 생각하면 열심히 찾아보길 바란다
결국 남는 것은 여기저기 갉아먹힌 채 너덜너덜해진 영혼뿐일 테니.
그렇기에 나는 오늘 부로 다시 태어났다.
매사에 감사할 줄 아는 마음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