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마음속에 간직할 함무라비를 그리며.
최근 한 친구의 추천으로 어떤 드라마를 알게 되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유일하게 챙겨본 TV 프로그램이다. 바로 JTBC <미스 함무라비>다.
과거 예스맨이던 나는 어느 순간 프로불편러로 변했다. 주위 따가운 시선탓에 회의감을 느끼기도 했으나, 이 드라마를 보면서 혼자가 아니라는 위로를 받았다. 지치고 힘든 밤, 마치 나를 따스하게 안아주는 기분을 느꼈다고 해야 하나.
심지어 현직 부장판사로 계신 문유석 작가님께서 이 드라마를 직접 쓰셨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가히 보수적인 집단의 끝판왕이라 불리는 법원에 계신 분께서 이런 원고를 쓰신다는 것을 통해,
'프로불편러'들을 보며 더 큰 '불편함'을 토로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일침을 가해주는 기분을 느꼈기에.
더군다나 매번 믿고 보는 배우 성동일 씨의 감초 같은 연기와, 남들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박차오름을 연기한 고아라 씨의 새로운 매력, 그리고 오래전부터 조용히 덕질을 해왔던 김명수(엘)의 눈웃음도 드라마의 매력에 빠지는 데 한 몫했다. 어느 순간 이 드라마는 나의 친구이자, 나의 존재 그 자체였다.
누군가는 드라마 내용이 뻔하다고 볼 수도 있다.
보수적 집단인 법원에 신임 판사가 들어온 후 주위 사람들을 하나둘씩 변화시키며 악의 무리들을 서서히 물리쳐가는 스토리. 실제로 극 중 주인공들의 러브스토리는 가히 성공적이었으며, 보수적이던 선배들이 하나둘씩 주인공의 편에 서거나 끝까지 저항하던 사람들은 결국 패배를 맞이했다. ㅡ물론, 극 중 재벌로 나왔던 NJ그룹 민용준 부사장도 쓰라린 패배를 맛보는 듯 보였지만 실제 그의 일상에는 작은 균열조차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당분간 기분이 저기압일 수는 있겠지만ㅡ
아무튼 이 드라마는 어릴 적부터 흔하게 봐오던 슈퍼맨과 비슷한 히어로물이나 별반 다를 게 없다. 물론, 아주 단순하게 바라봤을 때 이야기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 <미스 함무라비>는 그런 뻔한 히어로물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드라마였다.
사회의 최전선에 뛰어들어 변화를 외치며 현실의 벽에 부딪히던 나,
나이가 들어갈수록 '변화란 불가능한 것'이란 느낌이 들어 엄청난 회의를 하던 내가 이 드라마의 결말을 보며 생각을 다시 바꿀 수 있었기에. 그리고 어쩌면 말도 안 되는 내용이라 생각할 수 있는 부분도 서서히 현실로 변해가고 있기 때문에. 이 드라마는 그 변화와 저항 사이의 간극을 이상적이면서도 현실적으로 너무나 잘 표현해냈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 같지만, 놀랍게도 아주 가끔은 세상이 바뀐다. 누군가 질문을 한다면. 꼭 해야 되는데 아무도 하지 않는 그런 질문을."
꺼져가던 내면의 불씨를 다시 되살린, 나의 심금을 크게 울렸던 대사.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말. 이는 실제로 내가 사회 변화를 추구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다.
그렇게 주위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서서히 풀 죽어가던 나는 드라마 속 저 대사를 들으며 문득 무언가가 떠올랐다. 아주 가끔, 작은 계란 하나로 인해 바위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군가가 아무리 막을지라도 분명 사회는 변해간다는 희망적인 현실의 메시지를 말이다.
문득 정의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
어쩌면, 그것은 이미 우리의 내면에 있는 것은 아닐까.
평생 간직해야겠다.
남들이 나를 불편한 사람 취급할지라도 당당하게 할 말은 하면서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그리고 아무도 하지 않는 그런 질문을 내가 해야겠다는 각오를.
아쉽게도 나에게 여러모로 큰 깨달음을 주었던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는 막을 내렸지만 내 마음속엔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사회 부조리에 당당히 맞서 싸울 수 있는 소신과,
주위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용기만큼은.
그리고 작은 계란으로도 큰 세상이 변한다는 그런 확신만큼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