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N개의 공론장⑤「우리는 두렵지 않은 미래를 만든다」현장 기록
우리는 두렵지 않은 미래를 만든다: 디지털 성범죄 피해방지를 위해 우리는 각자의 위치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일시: 2020년 10월 18일(일) 14:00~17:00
장소: 서울특별시 청년허브 다목적홀
주최: 미닝오브
기록: 김미래
‘디지털 성범죄 피해방지를 위해 자신의 분야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이야기를 나누고 아이디어를 내는 반가운 공론장이 열렸습니다. 이 공론장을 기획한 미닝오브는 여성 영화인 3인이 모여 설립한 기록 콘텐츠 전문 기업으로, 이 시대 보통 사람들, 사회적 약자/소수자들의 목소리를 듣고 기록하는 팀입니다. 이들이 각자의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여성, 그리고 일상 속에서 디지털 성범죄에 노출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 있기도 한 여성들을 한자리에 모시고 다양한 의견을 나누었는데요. 때로 허무맹랑한 이야기나 아이디어가 나올지라도, 아니 그래서 더 자유롭고 풍성한 논의의 과정에서 여성 각자가 지닌 무력감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 ‘두렵지 않은 미래’라는 교집합을 희망할 수 있던 값진 시간이었습니다.
미닝오브는 필름메이커입니다. 저는 방송영상을 전공한 뒤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하다 마음에 맞는 여성 창작자들을 만나 미닝오브를 차렸습니다. 유명인이 아닌 보통 사람, 거시사가 아닌 미시사를 담기 위한 기록기업을 표방하여, 다큐멘터리, 영상에세이 필름, 비디오 레터, 자서전 전시 등을 기획 제작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일을 좋아하다 보니 워라밸이라 표현되는 일과 삶의 균형을 잘 맞추는 타입은 아닙니다. 시간적으로는 그렇지만, 그렇다면 하는 일에 삶을 조화시켜보자는 생각이 들었고, 삶과 밀접한 콘텐츠를 만들고 싶어 졌습니다. 일터에 앉아서 실질적 고민을 타개하지 못할 때 답답함이 들잖아요. 특히 이번 N개의 공론장을 기획하게 된 것은, 일상을 일이 담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할 때, 가까이는 N번방 사건 때 느낀 무력감에서였습니다.
사실상 디지털성범죄는 N번방 이전부터 웰컴투비디오, 소라넷, 웹하드 등 다양한 경로로 존재해왔습니다. 기술이 디테일하게 발달하면서 성착취 영상도 점차 교묘해지고 있는데요. 딥페이크 영상의 96%가 포르노에 해당한다는 네덜란드의 연구결과는 주목할 만합니다. 도용 피해자의 25%가 한국 연예인이라는 사실은 그저 충격으로 다가오지요. 현장에서 일하면서 스마트폰에 부착할 수 있을 정도로 소형, 저가의 VR기기나 드론을 구입하기 쉬워진 모습을 보니, 마음속 우려가 더욱 커지더라고요. 이런 기기들의 발달이 성착취물의 생산과 유통을 수월하게 만드는 데 쓰일 수 있으니까요. 슈퍼아이, 아웃박스, 십대여성인권센터, 일다, 깨톡, 위민두아이티 등 이번 공론장 기획에 있어 다양한 단체의 자문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 이 자리를 다채로운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좀 더 디벨롭하는 기회로 삼았으면 합니다.
학교 현장에서의 어려움과 아웃박스의 시도를 들려드리려 합니다. 아웃박스는 초등젠더교육연구회로서 교육과정 연구를 통한 성인지 감수성을 함양하는 것을 목표로 활동합니다. <예민함을 가르칩니다>라는 책을 발행하기도 했습니다. 5명으로 시작하여 현재는 24명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불법 촬영의 가해와 피해가 동시에 일어나는 가까운 현장이 바로 학교입니다. 최근 교육부의 불법 촬영 긴급 점검이 예고 후에 치러졌고, N번방 가입자 중 교사도 있었다는 이야기는 이슈가 되기도 했습니다.
교육의 본질은 여자답게 남자답게가 아닌 나답게를 가르치는 것일 테지요. 초등학교에 성평등교육이 필요한 이유는, 차곡차곡 쌓이는 고정관념이 성인지 감수성 발달을 막아 혐오에 이르는 결과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입니다. 유네스코에서 발표한 ‘포괄적 성교육’은 여성의 안전과 건강, 재생산권에 대한 교육 제도를 보장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성지식에 더해 공감과 이해를 바탕으로 존중 및 평등한 관계를 목표로 하는 것이 성교육이라 정의합니다. 하지만 2015 한국 교과과정을 보면, 성교육과 양성평등은 다른 카테고리로 지정되어 있으며, 성교육은 필수적이지만 양성평등에 대한 인권교육은 시수가 정확히 요구되어 있지 않습니다.
N번방을 넘어서기 위한 아웃박스의 활동은 문제 공론화입니다. 가해 예방, 방관자 되지 않기, 성상품화에 대한 인식 교육을 세부목표로, 교사 대상의 자료들을 제작하고 있어요. 교사분들을 설득해야 아이들에게까지 그 이야기가 닿을 테니까요. 교사의 특수성, 학교라는 보수적인 집단이 있어 조심스럽게 콘텐츠를 만듦에도, 불편해하는 시선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아웃박스의 실질적인 활동을 통해 알게 된 인사이트는, 우리 성교육의 방향이 실생활 위주, 성평등 관점에서, 지식을 넘어 대처기술까지, 시대변화를 반영하는 내용을 추가하기를 많은 사람들이 원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교육과정 내 성교육 시수 운영 내실화, 일반교사의 성교육 역량강화, 교육청 내 관계부서 마련, 성교육을 인권교육의 관점으로 확장하여 바라보기, 이러한 방향성을 가지고 학교성교육 변화를 위한 제언을 정리해나가고 있습니다.
씨네페미니즘 매거진 SECOND는 매년 한 권씩 발행되는 영화잡지로, 주로 영화 미디어 속에서 어떤 식으로 여성이 재현되는가를 연구하는 결과물입니다. 얼마 전 <성폭력범죄 보도세부권고기준> 실천요강이 나왔는데요. 강제성이 없음에도, 요강이 정리된 것만으로도 첫걸음이라 희망적으로 생각되는 지점이 있었습니다. 사진과 영상 보도에서 피해자들이 2차 피해에 노출되는 것을 가속화하는 경향이 있기에 이는 정말로 주의해야 할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한편 여성영화인으로서 우리가 느끼는 문제점은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논의되는 것들입니다. 이를테면 기안84의 경우 악의적인 표현이 명확함에도, 창작의 자유라는 그늘 안쪽으로 안전하게 숨을 수 있습니다. 기준이 없으니 잘못을 설득시키는 데 엄청난 노력과 비용이 따릅니다.
백델 테스트를 다들 아실 겁니다. 여성이 이름을 가졌는가, 대화에 참여하는가 등 몇 가지 항목을 통해 한 작품의 성평등/성차별적인 요소를 가늠할 수 있는 비평의 도구인데요. 단순히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느꼈어요. 정준영 단톡방 사건 때 SECOND에서는 대중영화 내 성매매로써 권력의 상징을 묘사하는 것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SECOND에서 제안하는 테스트는 강간문화와 2차 피해를 양성하는 영화의 문제적 재현방식 3가지를 목록화합니다. ①성매매를 권력의 상징으로 묘사하는가 ②성폭력 범죄에서 여성 피해자를 배제하는가 ③강간을 강간이 아니라고 하는가, 세 가지입니다.
<아이 캔 스피크>, <여자, 정혜> 등에서 드러난 입체적인 여성의 모습, 여성에 대한 상상력 확장이 필요하리라 생각됩니다. 부지런히 기준점을 만들어가며 참고할 만한 영화를 제작하고 그 영화의 흥행 역시 뒤따라야 할 것입니다.
A : 수진 님의 발제를 들으며, 학교 현장에 실천적인 무언가를 적용하려면 어떤 절차를 거치게 되어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수진 : 행사에서 적용하기 사실 쉽지 않아서 외부와 협업하려고 시도하게 됩니다. 공무원이다 보니 절차도 복잡하고 결재받기도 쉽지 않아요. 서울교대 안에서 니즈가 있어서 협업했을 때도 서울교대의 도움은 크지 않다는 한계가 있기도 했습니다.
C : 교사분들이 보수적이라고 하셨는데 교사 집단 내의 분위기는 어떤가요? 위축되거나 아니꼬워하는 시선이 있나요?
수진 : 젊은 교사가 밖에서 무언가를 한다는 것 자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분들이 많습니다. 일례로, 아버지 학부모 상담을 기획했다가 행사 직전에 취소된 적이 있어요. “꼭 아빠가 가야 하나요?”라는 질문을 담은 문자메시지가 교무실에 접수되었는데, 취지를 제대로 설명해 드리지도 못한 채 사과드리고 행사를 철회하게 되었지요. 그 일로 학교를 옮겨가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들이 학교에 오기 위해서는 부른다고 하는 명분이 필요할 수도 있는데, 최소한의 용기를 내주신 분이 20분 정도 모였고, 긍정적인 반응이 대다수였지만, 안타깝게 결론이 났습니다. 사실 성교육을 원하는 학부모분들은 많지만, 구체적인 내용에 관해서는 각자 바라는 형태에 차이가 있습니다. 한 번은 아저씨가 편하다는 이유로 치마를 입고 빵을 만드는 동화책이 있는데 부모님 중 자신의 아이에게는 이러한 종류의 책을 읽히고 싶지 않다고 하는 분도 계셨습니다. 민원이 들어올 수 있기 때문에 미리 상세한 내용에 대해 고지 드리고 있어요.
D : 긍정적인 남성상을 보여주는 것도 중요할 것 같군요. 남성 집단을 잠재적 가해자로 상정하는 것이 우려된다면, 가치관을 정립하는 시기에 있어서 안 좋은 모습보다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방식이 효과적일 수도 있을 듯합니다. 저희가 만드는 게임에도 이런 고민을 담고 있습니다. 미디어 리터러시 공부를 하면서 느낀 것이 있는데요. 참수당한 프랑스 교사 얘기 아시나요? 표현의 자유를 가르치면서 알라신을 풍자하는 사진을 보여주면서 토론을 시켰다고 해요. 근데 실제로 학생이 찾아가서 교사를 살해한 일이죠. 이슬람 종교의 배척성을 느꼈고, 약자들을 미디어가 조망하면서 어떤 식으로 해야 하는지 고민이 많이 되더군요. 사회적 소수자들을 위한 교육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C : 영화 시나리오 작가를 지망하고 있어, 영화 콘텐츠를 많이 접하는 편인데요. 서양 영화를 보다 보면 아랍 사람들이 참 교활하다는 생각이 들잖아요, 어느 날 그 생각이 좀 낯설게 느껴지더라고요. 오리엔탈리즘, 즉 서양의 그런 혐오는 아주 뿌리 깊죠. 서구권이 실질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점령의 지위에 올라 있기 때문에 주변에 있는 우리까지도 자연스럽게 그 가치관을 체득하게 되는 듯합니다.
D : 아이들이 폭력적인 것들을 콘텐츠로 소비하게 되잖아요. 여기서부터 문제가 연쇄적으로 발생하는데 이 말도 안 되는 구조를 더 많은 사람이 공론화하고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E : 저는 사실 모든 것이 엔터테이너로 귀결되는 점이 문제라고 생각해요. 모든 것이 재미다, 재미를 위해서다, 팔리는 콘텐츠를 만들어야 하는 식으로 정리되잖아요. 예술가들, 창작자들이 본인들의 창작물이 사회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을 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는 것 같아요. 여성 서사가 더 잘 팔린다와 같은 통계가 나와야 해요.
F : 많은 분이 데이터를 채집하고 도출하는 일들을 하고 계시잖아요. 이런 올바른 것들도(것들이) 잘 팔린다 하는 것을 소비자들에게도 알려줄 수 있다면, 소비자들을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제작자들에게 알려줄 수 있다면, 상황은 개선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미지 재현에 대해 고민이 참 많습니다. 제가 좋은 예시라 본 작품은 <합법해적 파르페>라는 웹툰인데, 당연하게 남자가 등장하겠다고 예상되는 부분에 여성들이 활약하는 점이 눈에 띄더군요. 등장인물들이 여성인데 특별한 부차 설명이 없어요. 당연하게 나오는 거죠. 또 하나는 제가 최근에 본 넷플릭스 드라마에서도 어떤 특수성을 부여하지 않고도 흑인 아버지와 아시아인 어머니를 가진 아이, 레즈비언인 아이가 자연스럽게 그려지는 것이었어요. PC함을 추구하는 방식이 특별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우리 곁에 자연스럽게 존재한다고 말하는 방식이 참 좋았던 것 같아요.
G : 코로나로 인해 OTT(Over The Top) 서비스들이 흥행하게 되었잖아요. 그래서 바로 플랫폼에 올라오는 경우가 많아졌고요. 콘텐츠 시장 안에서 엄청난 지각 변동이 일어나고 있어요. 예전엔 투자배급사가 밀어준 사람들만 잘되었지만, 요즘은 어느 정도 기회가 생겼다고 생각해요.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틈 말입니다. 여성 소비자들이 정말 많기 때문에 변화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 같아요. 넷플릭스 코리아에서 <보건교사 안은영>을 만드는 것을 보니, 소비자가 원하는 걸 드디어 조금씩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F : 윤리에 관련해 말해보고 싶어요. 사회적 소수자가 지역사회에서 차별받지 않고, 동등한 하나의 개인으로 받아들여질 것을 약속하는 ‘차별 없는 가게’ 캠페인이 있었습니다. 의료 쪽에도 이런 가게가 있다면 멀더라도 가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산부인과의 오진 때문에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뻔하기도 한 적이 있어서 더욱 그랬어요.
H : 자본의 끝판왕이 병원인 것 같아요. 클레임이 많이 들어오면 잘릴 수밖에 없으니까요.
F : ‘일다’ 기자님과 인터뷰했을 때 최근에 본 인터뷰 중에 어떤 것이 좋았느냐는 물음이 있었는데 저는 김지은 씨 인터뷰를 한 것이 좋다고 답했어요. 김지은 씨의 일상을 다루는 기사였거든요. 내부고발자인 만큼 사람들이 그 이후의 삶은 궁금해하지 않지요. 조민기의 자살로 그 피해 사건의 서사가 마무리되는 것이 피해자를 위축되게 만드는 것 같아요. 피해 이후의 삶을 보여주는 것은 늘 부족합니다. 이들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할 것 같거든요. 지금의 미디어에는 상상력이 부재한 듯 보입니다.
D : 제가 <여자, 정혜>에서 유의미하다고 생각되었던 것은 피해자라면 으레 할 것이라고 여겨지는 고정관념을 벗어난 묘사입니다. 성폭력 피해자가 다시 사랑할 수 없을리라 생각하는데 이 영화는 그 후의 피해자 삶도 괜찮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미닝오브 : 콘텐츠 분야에서는 참고할 만한, 정리된 가이드라인이 있어야 할 것 같아요. 대화를 나누다 보니 저희가 짠 목차대로 흘러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 나눌 수 있던 것 같네요. 제가 테이블 구성할 때 서로에게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방향으로 구성했어요. 모두에게 네트워크를 넓히는 자리가 되었길 바라며 오늘 공론장 이렇게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두렵지 않은 미래를 만든다 공론장 리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