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대로 그려놓았던 멸망의 날은 아주 제대로 오만하기 그지없었다.
2020년은 정말 이상한 해이다.
코로나19는 우리의 일상을 잠식해버리더니, 이제는 코로나19가 일상을 넘어 삶과 아예 함께 하고 있다. ‘BC(Before COVID-19)와 ‘AC(After COVID-19)라는 말을 듣고도 충격이 가시질 않았는데, ‘코로나 이전의 생활로는 돌아가기 어렵다’는 말은 이제 기시감마저 든다. 영화, 책, 드라마 속에 나오는 마스크 없이 사는 세상은 박물관에 전시된 것을 지켜보듯 마치 아예 다른 행성의 일인 듯 시공간이 모두 이질적이다.
코로나만으로도 힘든데, 올해는 사상 첫 50일 연속 장마를 기록하고 있다. 이 정도면 장마가 아니라 우기 아닌가 라고 생각했는데, 장마가 아니라 ‘기후위기’라고 한다. 북극 최후의 빙하는 이미 녹고 있고, 멀지 않은 2030년에는 북극 얼음이 모두 사라진다는 말도 거짓말처럼 느껴졌는데. 노아의 방주도 알고 보면 40일이었다고 하니, 이 정도면 정말로 우스갯소리로 하는 ‘지구는 멸망할 건데 인간들이 눈치 없이 살아있다’는 말이 농담만은 아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코로나와 기후위기로 인한 인명피해 숫자는 새로 업데이트되고 있다.
늘 멸망했으면 좋겠다고 생각은 해왔었다.
그리고 지구의 입장에서는 모든 인간은 하등 쓸모가 없는 존재임에도 분명하다는 것도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었다. 주는 것도 없이 받아 빌려 쓰고 있던 주제에, 이제는 주인인 양 행사하는 인간들은 너무나 오랫동안 뻔뻔하기 그지없는 양아치였다고. 그래서 이수정 교수님이 ‘인간에겐 희망이 없다’는 말에도 공감하며 엄청 끄덕거렸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한 멸망은 하루아침에 화산 폭발이나, 운석의 충돌, 쓰나미가 몰려오는 수준이었지. 이렇게 야금야금 천천히 인간들을 말려 죽이는 수준일 줄은 몰랐다. 마스크를 안 쓰고 마시는 공기가 이토록 소중하고, 햇빛을 보는 것이 이토록 간절한 일이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내 마음대로 그려놓았던 멸망의 날도 알고 보니 아주 제대로 오만하였던 것이다.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뭘 할거야? 라고 오가던 질문과 상상도 지구 입장에서 들었을 때는 아주 어이가 없어서 코웃음이 났을 상황이다.
사람들은 이런 시대에 뭘 해야 할지 몰라서 우왕좌왕이다. 코로나와 최장기적 장마를 대하는 자세도 각양각색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코로나가 삶을 집어삼킨 무서운 존재이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운 나쁘면 걸리는 거지 싶은 정도다. 어떤 사람에게는 장마가 집 안으로 가득 들어온 빗물과 토사, 배수구가 넘치는 상황에 더하면 가족까지 사망하는 현실이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영화 <기생충>에서 기우, 기정의 집을 관람하듯 뉴스에서나 보는 남의 일이다.
나는 어떤 쪽일까, 어떤 태도로 이 시대를 살아야 하는 걸까.
너무 무서워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덤덤하게 생각하는 것도 아니기만 하면 되는 걸까. 안타깝다고 슬퍼해도 되거나, 감사하다고 다행으로 여겨도 되는 걸까. 아직도 적응하고 있는 중일까, 아니 적응이라는 말이 가당키는 한 걸까. 이 시대에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을 운이 좋다고 해야 할까 운이 나쁘다고 해야 할까.
당장의 긴급한 위기상황으로 여기고 무언가를 행동으로 옮겨야 할 때인 걸까, 천천히 하고 있던 것들과 할 수 있는 것들을 계속하면 될까. 나중에 이 2020년은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아니 그 나중에 우리라는 인간의 존재는 있긴 할까? 플로피디스크 모양의 이모티콘처럼, 전화기 모양의 특수문자처럼. 있었음을 어렴풋이 남기게 될까, 있었는 줄도 모르게 사라질까. 우리는 사라짐을 당하는 쪽일까, 스스로 사라지게 한쪽일까. 우리는 피해자 방관자 가해자 중에 어느 쪽일까.
지구, 대한민국, 이천이십년 팔월의 열두째날,
다 놓아버릴 수도 없고 또 그렇다고 다 붙잡고 있을 수도 없는 것들을 이렇게 어정쩡하고 뜻뜨미지근하고 미적지끈하게 이런 모습 이런 모양으로 이렇게 팔자좋게 글을 썼다.
이천이십년은 정말 이상하다, 고.
글 성지연 /
일러스트 Peter Ark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