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1학년 때, 늘 학교에 가면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집에 왔던 기억이 난다. 반 아이들과도 말을 안 하고, 당연히 손들고 하는 발표는 절대 하지 않았다. 나에게 놀리거나 장난을 거는 남자애들에게 “하지 마!”라고 한다거나, 도망가는 것을 쫓아가서 혼내주지 않고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만히 쳐다보면’ 그게 무서웠는지 다시는 안 놀렸던 기억도 난다.
쉬는 시간에는 늘 조용히 앉아서 색연필을 색깔별로 정리하며 시간을 보냈다. 모두가 돌아다니며 말을 하는 그 시간이 나는 썩 달갑지 않았던 것 같다. 색연필 표지에 있는 빨주노초파남보 색깔, 처음 받았던 그 순서대로 흩어진 색연필들을 가지런히 정리하는 것이 나의 일이었다.
말을 하지 않으니 친구도 없어서, 학교가 끝나고는 혼자서 역시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놀이터에서 모래 장난을 하며 놀다 집에 들어갔었다. 언젠가는 어떤 오빠가 내가 있는 모래밭 옆으로 자전거를 타고 세게 지나갔다. 그때 그 장면과 말이 아직도 생생한데, 그 오빠가 “야 이 벙어리야!!!” 라고 소리쳤던 기억이 난다. 지금이었다면, 나도 당연히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고 다른 누군가에게 속상함도 토로했을 텐데. 그리고 지금은 그 벙어리라는 말도 차별적인 언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때의 어렸던 나는 역시나 ‘아무 말 없이’ 바로 일어서 집으로 걸어왔다.
그렇게나 말이 없던, 아니 말을 아예 하지 않고 살던 그 시절의 나에게 말을 걸어주었던 두 명이 있었다. 한 분은 1학년 담임 선생님이셨고, 또 다른 한 명은 학준이라는 같은 반 남자애였다.
선생님께서는 손을 들지도 않는 나를 자꾸 발표하도록 하셨다. 생각하는 것을 들리지도 않게 개미만 한 목소리로 대답하면, 그때마다 엄청나게 폭풍 칭찬을 해주셨다. 대망은 반 아이들 모두가 한 번씩 돌아가면서 해야 하는 동시 암송 발표였다. 그냥 발표도 힘들 판인데, 자리에 앉아서도 아니고 앞에 나가서, 그것도 외워서 해야 하는 암송이라니. 정말 떨면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시 낭송을 마쳤을 때도, 선생님께서는 너무너무 잘했다며 미래의 시인 같다며 엄청난 칭찬을 해주셨었다. 그렇게 점점 학교라는 공적 공간에서 ‘말’이라는 것을 하게 되었다.
그때 선생님께서 자꾸 나에게 말을 걸어주셨던 것은 ‘네가 거기 있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어.’라는 의미였다.
그리고 학준이라는 남자애는 계절이 바뀌고 언젠가부터 내 짝이 된 아이였다. 학준이는 짝꿍이 된 이후로, 늘 쉬는 시간마다 혼자 색연필 정리를 하던 내 옆에서 본인도 같이 나란히 앉아서 색연필을 정리하곤 했다. 말을 걸었다면 부담스러웠을 것이고, 장난을 걸거나 짓궂게 했다면 분명 또 내가 아무 말도 안 하고 지긋이 쳐다봤을 텐데. 그럼 그 이후로 다른 아이들처럼 더 이상 말을 안 걸었을 텐데. 학준이는 늘 그냥 아무 말 없이 내 옆에 앉아서 내가 하는 행동을 같이 해줬었다.
말을 건네지 않았는데도, 말을 건네어주는 기분. 어린 마음에도 그게 참 따뜻하고 위안이 되고 고마웠었다.
그랬던 그 시절의 내가 지금은 어쩌다 보니 자라서 ‘말’하는 직업을 갖고 있다.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말을 하며 산다. 아마 앞으로도 살아있는 동안은 그럴 것이다. 이렇게 말을 하며 살고, 말로 밥까지 벌어먹을 수 있게 된 것은 어쩌면 일곱 살 시절, 감사하고 고마운 그 두 사람 덕분인지도 모른다.
언제나 분명한 사실은 ‘말’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이 존재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아무도 없이 혼자 있는 사람에게 말은 의미가 없다.
서로의 옆에 존재하는 것.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알아주는 것.
서로에게 기회를 주고 기다려주는 것.
들어주는 누군가가 있어야 가능한 것.
먼저 건네주는 사람이 있어야 시작되는 것.
어떤 말들은 말함으로써, 또 어떤 말들은 하지 않음으로써 오랫동안 가슴에 남는 것.
내가 살아가면서 했던, 하는, 할, 기억도 못 할 수많은 말들 중 어딘가에 가닿아 그런 ‘말’이 될 수 있다면 ㅡ
지금 이 생도 살아볼 만할 것 같다.
글 성지연 / 그림 ©Saki Iyo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