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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지연 Jun 25. 2022

거기 있다


너무 그리워하고 그리워하고 그리워하다 보면 그래서 생각하고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 보면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싶어진다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것들에 숨을 불어넣어 물 위에 자꾸 뜨게 만들다 다시 가라앉고 뜨기를 반복한다 어느샌가 생각만 해도 너무 아득하고 아려진다


나에겐 전주가 그랬다


전주가 준 것들이 가득해서, 받은 것들만 잔뜩 많아서, 아름다운 것들만 모여있어서 언젠가부터 전주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다. 내 안이 어둠으로 가득 차 잠이 들지 않을 때면, 내 생애 좋았던 순간들을 화아한 구슬처럼 꺼내보곤 하다 정말 아껴 보는 영화의 간략한 티저 영상을 보듯이, 바래고 바랜 비디오테이프를 틀고 또 튼다.



그 순간들에 늘 전주가 있다


노르주황빛 한옥마을 길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술을 마시고 휘적휘적 걷던 내가, 비 오는 날에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우산을 쓰고 걷던 내가, 어느 여름날 초록 물결 사이로 자전거를 타던, 그리고 전동성당에서 미사를 마치고 돌아가던 길 남천교 위에서 노을을 바라보던 내가, 도로 옆 불빛들이 서서히 줄어들며 검은색 바탕 위 작은 불빛들이 점 점 점 점ㅡ점과 점으로 지평선을 따라 줄지어지던 장면을 오래도록 바라보는 내가 있다


거기 있다



전주에 가고싶다


이 곳만 아니면 모든 게 괜찮을 거란 마음이 들 땐 늘 혼자 전주로 망명을 갔다. 짙은의 안개라는 곡에서 “누구도 우리에게 질문을 하지 않는 처음 같은 곳으로 도망가기 좋은 날”일 때는 늘 그렇게 전주로 갔다. 나는 정말 오래도록 전주로 도망갔다. 자꾸 도망가는 마음은 습관이 됐다. 쌓이는 눈을 보며 한낱 무력감을 느끼듯, 도저히 막을 도리없이 꿈결에 나와버리듯 나에게 전주가 그래버렸다. 너무 그립고 그리우면 어찌 할지를 몰랐다.


괜찮습니다 입 밖으로 내고 표정을 짓고 있지만 사실은 너무 안 괜찮다고 마음으로 소리질러 말하고 싶을 때마다, 어른인 듯 괜찮은 척 하지만 어린아이처럼 엉엉 꺼이꺼이 끅끅거리며 울고싶을 때마다에도 늘 잠들기 전 전주에 갔다. 모든 계절이 그토록 아름답지만 그 중에서도 겨울이 가장 아름다운 전주에 가서, 하얀 눈이 소복이 내려앉은 풍경을 보다 엉엉 울고 나면 그동안의 마음들이 전부 다 위로가 될 것 같았다.



전주에 가고싶지 않다


너무 사랑하던 장소에 아주 오랜만에 갔을 때, 바뀌지 않고 그대로인 것들을 겨우 겨우 찾아내고 반기며 안도하다, 시간이 흐르며 바뀐 것들이 많은 지극한 당연함 속에 놓여 길을 잃은 사람처럼 슬퍼지고 싶지 않았다. 네가 그토록 사랑하던 전주는 이제 정말 네 마음 속에만 있어. 눈을 뜨고 바로 돌려 직시하여 목도하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 때 그 시절에, 다시 오지 않을 그 장소에, 그 때 그 시간 속에 나와, 그 순간의 순간들에 어쩌면 그렇게 한 자리에 우연히 만나 운명처럼 함께 있던 사람들. 이제 거기 없어. 뿔뿔이 흩어졌어.


아무리 문장으로 남겨보려고 해도 그런 순간들은 결국 내 기억에만 있다는 걸. 이제는 내 마음에서만 불러올 있다는 걸 온 몸으로 체득해야 하는 것이 아팠다. 살기 힘들어지면 전주가서 살면 돼, 은퇴하고 나면 전주가야지, 이렇게 아둥바둥하지말고 전주 가서 살자, 살아버리자 하다 내가 미화하고 있음도 알았다.


그래서 안다


다시 또 그리워하고 그리워하고 그리워하고 그래서 생각하고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할 것을 안다. 몇 번이고 다시 도망하고 망명하다 실제로는 그리 자주 가지 않을 것도 안다. 언젠가 가서 내가 두 발을 딛고 서는 날에도 그 곳은 다시는 갈 수 없을 곳이라는 것도 안다. 다시 가도 그 때의 전주와 지금의 전주는 다를 것이라는 것도. 그런 좋은 호우시절이 마음 속에 품어져 있는데 언제 어디에 있든 문득 문득 슬프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이라는 것도 안다. 그래, 다 안다.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은 그리워지는 것이 많아지는 것이겠지. 그리울 때는 그리워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는데, 그리움으로부터 아무렇지 않게 홀연해지는 나이도 올까. 지나고보면 오히려 지금이 그리워질 수도 있을까. 이렇게 지금 아닌 거기, 여기 아닌 저기를 늘 그리워만 하다 죽는 것은 아닐까.


어리석은 나는 어쩔 수 없이 오늘도 그저 그냥 그리워한다. 무언가를, 누군가를, 어떤 순간들을 그리워할 때 늘 자주 거기에 전주가 있으니까.

이미 있어버리니까. 존재하니까. 그렇게 나에게 전주가 있으니까.



그리우면은 그냥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나의 전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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