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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지연 Aug 09. 2020

애증하고 애증하는 나의 일

모두가 퇴사를 권하고, 모두가 퇴사를 원하는 시대에 일에 관하여



“나를 나답게 해주는 것”

이 주제에 대해서 한 시간 반, 왕복 세 시간씩 걸리는 출퇴근길에 오래도록 생각해보았습니다. 나를 나답게 해주는 것을 생각하려면, 일단 ‘나’ 자신이 누구인지부터 알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집에서 직장으로, 다시 직장에서 집으로 오가는 생활. 쉬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일하기 위해 쉬는 생활. 언젠가부터 만나는 사람의 대부분이 직장 동료뿐인 생활 속에서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새삼스러웠고, 입 안에 삼킨 밥알들 사이로 작은 돌멩이를 씹은 듯 자꾸만 마음이 덜컥거렸습니다.


©belhoula amir



나를 나답게 해주는 순간은 어떤 순간들일까요?

처음에는 즐겁고, 기쁘고, 행복하고, 살 만하게 느껴지는 순간들을 떠올렸습니다. 사랑하는 강아지와 나뭇잎들이 솨아아 거리는 나무 사이를 산책하는 순간. 애정하는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낄낄대는 순간. 좋아하는 음악을 켜고 듣는 순간. 퇴근 후 냉장고를 열어 시원한 맥주를 칙 따서 들이키는 순간.

그렇지만 이렇게 평안하고 안락하며 즐거운 순간들만이 과연 나를 ‘나답게’ 해주는 것일까?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나의 일을 떠올렸습니다. 사람은 인생의 약 3분의 1 정도를 자신의 ‘일’을 하며 보낸다고 합니다. 노년기에서나 3분의 1 이겠지, 지금은 3분의 1 은커녕 3분의 3도 넘어 일상을 집어삼켜버린듯 합니다. 로또만이 답인 것 같고, 워라벨과 같은 말은 꿈의 단어로만 느껴지며, 진정한 삶은 영원히 유예되고 오직 견뎌야 하는 순간들로 채워지게 하는 나의 ‘일’을 떠올리면 부정적인 마음이 먼저 앞서버립니다.



©belhoula amir



ㅡ 아아, 또 출근이야 !

언젠가는 일요일 밤에 8090 음악을 랜덤으로 듣다가, 가질 수 없는 너 - 원하고 원망하죠 - 사랑과 우정사이까지 연이어 나오는 게 가슴 깊이 사무치게 슬퍼져 오던 밤길 돌려 그대로 속초에 가고 싶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출근과 동시에 퇴근하고 싶고, 월요일 시작과 동시에 금요일 밤이었으면. 주말은 순삭이고 평일은 굽이굽이 굽이쳐 언제 끝날지 기약이 없습니다. 아침시간 5분 늦는 것이 더 한 지옥철을 맞이하고, 갑자기 걸려오는 회사 책상 벨소리와 메신저소리는 끔찍하도록 몇 번이고 쿵 쿵 내려앉게 합니다.


ㅡ 그래도 감사하게 여겨야지.

어딘가에 내가 출근할 수 있는 자리가 있고 코로나 시대에도 월급을 받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며 스스로 도닥거려 봅니다. 그래, 길고 긴 수험생활시절과 그토록 취업을 하고 싶었을 때는 그때 그렇게도 바라던 게 지금 이 모습인 거야.
감사하자, 감사하자, 감사하자

하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감사고 뭐고 다 때려치고 싶습니다.

이게 사는건가, 남들도 다 그렇게 산다고 하면 위안이 되나, 이것보다 더 어렵고 힘든 일도 많다 싶은가. 아니, 격렬하게 말하면 ‘지금에 감사해야지’라는 말도 때려치고싶고 ‘예전에는 이랬어.’라는 말도 날려버리고싶고, ‘이거야. 이거면 다 돼.’를 찾아 여전히 끊임없이 헤매고 또 헤매는 느낌일 때가 많습니다.



©belhoula amir



ㅡ 하아, 정말 먹고 살기 진짜 드럽게 힘들다.

‘일이 너무 많아 고되다, 먹고 살기 힘들다’라는 생각이 자꾸 들 때면 후대 역사책에 [당시 백성들은 노역으로 힘들어했다.]와 같은 한 문장 안에 굵은 궁서체 글씨로 내 인생이 송두리째 들어갈지도 모른다는 부질없는 상상을 합니다.

연차가 쌓여갈수록 알아야 할 것들이, 또는 저절로 알아지는 게 많아서 고단합니다. 눈을 질끈 감고 다 모르는 척하고 싶습니다. 굳이 내가 아니어도 된다고 내 일만 아니라면 그렇게까지 할 필요도 없다고 간단명료해지고 싶습니다. 잎맥을 따라 보호색을 띠고 누워있는 애벌레처럼 그저 가만히 웅크렸다 펼쳤다 아무것도 안 하고 기대어 쉬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belhoula amir



그럼에도 누군가 그렇게 힘들면 다 놓아도 돼, 그 일 안해도 돼. 라고 했을 때 ‘일을 하지 않는 나’를 상상하기란 어렵습니다.


그렇게도 출근하기 싫었는데 아침에 회사에 도착하여 컴퓨터를 켜는 순간, ‘일하는 나’로서 새롭게 셋팅되는 순간. 스위치가 온으로 딸깍 켜지고 온 몸에 도는 피가 다른 색깔로 뻗어나가는 기분. 전장에 나온 듯 감도는 약간의 긴장감과 무언의 안도감을 조금 좋아하는 것도 같습니다.

일하며 생기는 문제 위기 상황에서는 내가 과연 어떤 사람인지,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너무나 잘 보여주기도 합니다. 취미로 만난 소모임이었다면, 그저 좋은 모습만 하하호호 보여줄 수 있는 친목모임이었다면 전혀 볼 수 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또 보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과정에서 나 자신에 대해, 다른 사람에 대해, 아니 아예 인간 자체에 대해 환멸스러움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너무나 다르고 다름을 알게 되더라도 그럼에도 ‘그럴 수도 있지’라고 이해하려고, 이해해보려고 하는 것. 일로 인해 서로에게 닿아보려고 노력하다가 아주 조금씩이라도 가닿게 되는 순간들을 좋아합니다.


©belhoula amir



어떤 일이 드디어 마무리되고, 마감! 종료! 드디어 디엔드! 끝끝끝!!! 끝나는 크고 작은 성취의 느낌도 좋습니다. 일이 모두 완료된 후에 흐물흐물 허물어지듯, 꽉 조여졌던 끈이 느슨해지듯, 스르륵 멍해지는 순간들도 좋아합니다.


협업해야 하는 일이라면 함께 일하는 동료들과 생기는 괜한 연대감도 나쁘지 않습니다. 아무리 이야기하더라도 타 직종 사람과, 또는 같은 직장 내에서가 아니라면 크게 공감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나누며 분개하고 욕하고 울고 웃게 되는 인간적인 순간들도 좋아합니다.


다른 사람이 몰라주더라도 서로 너무 수고했어, 완전 애썼어, 진짜 고생 많았다 는 말 한마디에, 회식자리에서 부딪치는 술잔 소리에 나 외의 다른 존재가 내 힘듦을 모두 온전히 다 알아준 것만 같은 사치도 부려봅니다.


통장을 스쳐 지나가는 월급날이지만, 그런 날에 사랑하는 강아지에게 맛있는 간식을 사다 주고 강아지가 입을 크게 벌려 아그작 아그작 먹는 걸 보는 환희와 기쁨.  ‘그래, 내가 우리 야호 이렇게 맛있는 거 맥일려고 아주 개고생하며 밥벌이했지’하며 스스로 으쓱대며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도 좋아합니다. 그거 하나로 내 지난 한 달이 다 의미 있어지고 보상받는 것만 같은 느낌을 좋아합니다.



©belhoula amir



브런치에도 늘 퇴사 이야기는 모두의 관심 단골 소재입니다. 우스갯소리로 브런치를 보면 우리나라에 이렇게나 퇴사자가 이렇게도 많았구나를 알게 해 준다고 할 정도입니다. 모두가 퇴사를 원하고 모두가 퇴사를 권하는 이 시대에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나답게 해주는 것”에 대해 EBS x 브런치가 던진 질문에 스스로의 대답은


오히려 너무도 싫어한다고 하면서 이로 인해 생기는 어떤 순간들은 좋아할 수밖에 없는,

끊임없이 환멸스러워하고 욕하면서도 아직은 놓지않고있는,

일과 일상과 삶이 실은 너무 딱 떨어지게 선 긋듯 구분되지 않음을 알게 하는,

살아가기 위해 해야만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팽팽하게 살아있는 느낌을 갖게 하는,

정말로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만나게 하고 끊임없이 배워나가게 하는,

니체의 유명한 말을 바꾸어 말해보면 ‘우리가 일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일 또한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게 해 주는’,

그래서 결국에 내가 누구인지 깨닫게 하는,



정말로 애정하고 애증하는,
나의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글 성지연 /

그림 ©belhoula am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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