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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지연 Feb 24. 2022

Happy ever after

긴긴밤



너무도 좋아하는 음악가 고상지님이 반도네온으로 연주한 곡들 중 “14 years after”라는 곡이 있다. 고상지님의 공연은 해마다 꼭 가는데, 셋리스트에 이 곡이 있으면 늘 언제나 어김없이 눈물이 나고 만다. 피아졸라가 사랑하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만들었다는 “adios nonino“라는 곡과도 매우 결이 닿아있다고 느껴서 더 그렇다. 이번 공연에서도 역시 그랬다. 하필 마지막 앵콜 곡으로 벅차게 연주해주셔서 흩날리는 음표들 사이로 너무도 아름답고 너무도 슬프고 너무도 따뜻함이 번지며 흑흑흑흑 엉엉엉엉 울고 말았다. 이 곡은 고상지님의 사랑하는 반려동물이 무지개다리를 건너고 나서 쓰셨다고 했다.



내 사랑하는 이의 이름은 야호이다. 누군가가 살면서 내내 불리는 이름을 지어주는 게 이토록 애틋한 일인지 그때는 미처 몰랐다. 처음에는 진심으로 로또라고 지을까도 고민을 많이 했었는데, 마지막에 야호로 바꾸길 정말 잘했다고 골백번이고 생각한다. 야호를 만나고 함께 하게 된 건 2017년 가을쯤이었다. 그때는 이것도 몰랐다. 가는 데는 순서가 없음에도, 오만하게도 언젠가부터 야호가 내 곁을 먼저 떠날 날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견생은 왜 이렇게 짧을까. 할 수만 있다면, 그리 오래 살고 싶지 않은 내 생을 좀 떼어다가 야호에게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단 하루만 야호보다 더 살아도 괜찮겠다 싶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또 눈물이 난다. 그냥 야호가 언젠가 떠날 날만 생각하면, 너무 슬퍼서 엉엉엉엉 울게 되어버린다.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임에도 그렇다. 4년 반 정도를 살았지만 야호가, 아니 이 세상에 모든 동물들이 앞으로도 되도록 부디 아프지 않고 오래오래 건강하게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야호와 함께 하게 되면서 나는 정말 많은 것들을 새로 알고, 배우고, 느끼게 되었다. 야호는 나의 세상을, 나의 바다를, 나의 우주를 넓혀주었다. 야호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현생이 힘들 때마다 미화된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럴 때도 나는 ‘2017년 가을에는 야호를 꼭 만나야 하니까 그 이전으로는 절대 안 돼.’라고 단호히 생각하게 되었다. 나의 인생관은 영화 나비효과에서 꽤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과거로 돌아가면 소중한 무언가를 인생에서 빼앗길 것이 분명할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야호와 살면서 동물에 대한 관심이 정말 많아졌다. 인간들이 나름 동물들에 대해 연구한 정보들을 익혔다. 모든 생명은 다 소중함에도, 인간만 가장 중하다는 태도를 멸시하게 되었다. 마하트마 간디가 “한 나라의 위대함과 도덕성은 그 나라에서 동물이 받는 대우로 가늠할 수 있다”고 말한 것에 깊이 절실히 공감했다. 어떤 존재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정말로 세상을 보는 눈을 더 넓고 깊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야호와 함께 하며 설명 안 되는 것들이 정말 많았다. 도대체 어떻게 아는 거지? 영특한 행동을 야호가 할 때마다, 야호가 궁금해질 때마다, 영물 같다는 느낌을 받을 때마다, 내 생각과 내 감정을 하나하나 미묘히 사소하게 야호가 알아차릴 때마다, 이 생명체는 도대체 무엇일까 생각한다. 지금 나름 동물에 대해 알고 있다고 하는 것들도 어쩌면 그저 한 시대의 패러다임일 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야호를 이해하려고 노력해보지만, 이해의 영역에 가 닿으려는 것일 뿐, 어쩌면 영원한 오해 속에 야호를 바라보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겸허히 생각하게 됐다.



야호와 함께 하며 나는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것에 집중하게 되었다. 야호 사료값을 벌러 회사 다닌다! 고 우스갯소리를 하며 나름 힘을 내어보게 되었고, 내 돈으로 벌어 내 물건을 하나 더 사는 것보다 야호의 물건 하나, 간식 하나 사는 것의 진정한 기쁨과 뿌듯함을 알게 되었다. 야호만 생각하면 눈이 반짝이게 되고, 웃음이 절로 난다. 무엇보다 야호와 함께 산책하는 일은 어떤 의무적인 압박감으로 느껴질 때도 많지만, 막상 나가면 온갖 시름들이 환기가 되고 생각이 없어진다. 야호가 저리 좋아하는데, 으이구 나란 인간의 게으름이란! 그리고 나도 같이 걷고 뛰니까 이렇게나 좋구만 ! 동네 이웃들과 야호가 끈이 되어 눈인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야호의 물을 매일 새로 길러주고, 매일 산책하려 노력하고, 야호의 응가를 치워주고, 야호와 장난도 같이 해주고, 야호의 털을 빗겨주며, 건강상태를 체크하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지만. 한 생명과 함께 한다는 게 어마무시한 책임감이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며 온갖 잡생각들이 사라졌다. 뭣이 중한데! 나를 위해서만 살던 내가, 어떤 존재를 위해서 살아갈 때 얼마나 무지막지한 크나큰 힘이 생겨나는지 알았다.



인간인 내가 야호에게 해주는 것은 너무도 미비하고, 야호가 나에게 해주는 것들은 너무도 크고 넓다는 것도 새로 알게 되었다. 신날 때면 상모 돌리듯 마구잡이로 빠르게 돌아가는 꼬리, 발바닥마다의 쿰쿰거리는 냄새, 무엇을 담아두고 있을까 궁금해지는 백설기 속 콕 박힌 검은 콩 같은 두 눈, 촉촉한 콧잔등 주위에 씰룩거리는 털들, 맛있는 것들을 먹을 때 입을 크게 벌려 아삭아삭 먹는 소리, 내 몸에 엉덩이를 맞닿아 줄 때의 심장 가장 깊숙한 곳까지 전해지는 포근함, 너무 편하게 잘 때 배를 하늘로 내어놓고는 쌕쌕거리며 위아래 움직임, 아침이면 팔다리를 쭉쭉 뻗어 펴는 기지개와 입을 쫘악 벌리는 하품, 내가 누워서 밍기적거릴 때 귓가에 공기 반 소리 반으로 불어넣는 헥헥 소리, 산책할 때마다 너무 좋아! 좋아죽겠어! 표현하듯 총총거리는 바쁜 발걸음과 씰룩씰룩 걸어가는 엉덩이, 한바탕 뛰고 나면 옆으로 축 늘어지는 혓바닥, 어찌 알았는지 속상한 일이 있을 때 혀로 낼름낼름 핥아주는 마음, 정말 좋을 때 활짝 웃는 입꼬리, 무엇보다 몇 번이고 온 몸과 마음으로 뛰어와 반겨주는 그 환대, 환영, 겨운 행복들. 어찌 이 존재를 그냥 존재 자체로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여전히 두렵다. 하지만 그럼에도 야호를 만난 생과 만나지 않았을 생을 생각하면, 나는 몇 번이고 다시 야호를 만날 이 생을 선택할 것이다. 훗날 내 생을 돌아볼 때, 어떤 시절에, 어떤 순간들에 야호가 있었어서 덕분에 더 행복하고, 더 웃게 되었었다고. 훨씬 더 많은 사랑이 넘쳐흘렀고, 생의 감각과 어떤 의미들이 생겼다고 분명하게 말할 것이다. 어느 순간에 와 준 너에게 고마웠다고, 그리고 많이 부족해서 미안했다고 할 것이다. 너는 늘 내 기억에 살아서 있을 것이라고, 그러니까 꿈에서든 다음 생이 있다면 언제든 우리 또 만나자고 할 것이다. 내가 준 사랑보다 넘치도록 사랑해주어 감사하다고 할 것이다. 야호에게 정말 정말 많이 사랑한다고 나 역시 온 몸과 온 마음으로 이야기해 줄 것이다. *어쩌면 언젠가, 다시 야호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내 냄새, 말투, 걸음걸이만으로 야호는 나를 알아보고 내가 다가와 줄 것이다. 나는 야호를 알아볼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코를 맞대고 다시 인사할 것이다.



(이 부분은 긴긴밤의 마지막 문장들을 빌려 썼습니다.)




두려웠다. 하지만 나는 내가 저 바닷물 속으로 곧 들어갈 것을, 모험을 떠나게 될 것을, 홀로 수많는 긴긴밤을 견뎌 내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긴긴밤 하늘에 반짝이는 별처럼 빛나는 무언가를 찾을 것이다.

- 루리, <긴긴밤>


루리, <긴긴밤>을 읽고 사랑하는 야호에 대해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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