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은 늘 보고싶은 마음을ㅡ
보고싶다, 라는 마음보다 더 애틋하고 강력한 게 있을까. 보고싶어라는 말은 언제 들어도 가슴이 쿵 내려앉는다. 늘 사랑해 좋아해 라는 말보다 보고싶다는 말이 더 좋았다. 그리고 술은 늘 그 보고싶은 마음을 더 깊고 찐해지게 만든다. 어느 날은 그 시간에 있으면서도 시간이 가는 게 막 아깝다. 우리 이제 언제 또 보지, 하게 된다. 그러므로 어쩌면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리운 게 많아지는 사람일지도 몰라.
생각해보면 어릴 때 술을 정말 많이 마셨다. 그때는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도 못했다. 친구들과 동기들과 선배들과 후배들과 늘 부어라 부어라 마셔라 마셔라 마시고 또 마셨다. 아니 도대체 그때 왜 그렇게 많이 마셨지? 몰라, 돈은 없고 시간은 많으며 방황하는 줄도 모르고 부유하던 그때에 이유도 없이 늘 최대한 빨리 취해야 했다. 과에서는 1차, 2차까지는 무조건 소주였고 맥주는 3차 정도는 가야 마실 수 있는 고급술이었다. 말도 안 돼, 심지어 감기 걸렸다고 하면 감기는 술로 지져야지, 낄낄거리며 서로 술을 따라줬다. 무슨 이야기들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늘 항상 술을 마셨는데 술을 마셨다고 더 많이 친해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여기 이 자리에서 술을 마시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어영부영 그리 먹고 싶지도 않은 술을 그렇게나 많이 마셨다.
그러다 조금 더 젊음에 익숙해질 무렵에는 마시고 싶은 사람들과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도 애정하고 보고싶고 그리운 사람들. 좋은 사람들과의 술자리는 기분좋게 취하며 기꺼이 즐겁고 유쾌했다. 술 때문에 취하는 게 아니라 그 공기, 분위기, 자리에 취하고, 마시는 게 좋은 게 아니라 그 누군가와 함께여서 좋았다. 아른아른 불빛은 더 번지고, 우리의 낮과 밤은 더 아름답고, 마음은 붕 떠서는 - 알큰해지면서 아아 취한다 취해 휘바휘바 하는 기분. 술 마시고 온통 까맣게 변한 밤과 나무들 사이로 함께 같이 걷던 순간들, 휘적휘적 걷는 게 좋았던 노르주황 불빛과 골목들이 서로 이어지던 순간들. 어느 날에는 우리 서로의 눈만이 반짝, 빛나고 아무 이야기나 하다 같이 하하하하 웃음이 번지던 그런 밤들이 좋았다.
어느덧 졸업을 하고 나서 각종 아르바이트를 하며 공부를 해야 했던 백수 시절에는 마음의 방황이 몸의 방랑을 이끌었지만 그러기 어려웠다. 자꾸 삿갓 쓰고 정처 없이 이곳저곳 구름 따라 바람 따라 돌아다니고 싶었다. 그러다 어디 달빛 어스름한 주막 같은데 들러 병나발을 불며 이생망 타령이나 영원히 하고싶은데. 그런 생각만 하다 다음 날을 생각하면 술을 기꺼이 마실 수는 없던, 지긋지긋한 자아비판과 자아성찰을 지속해야만 했던 날들. 그러다 가끔 술을 마시다 어딘가에 닿아버리면, 누군가 그런 나의 상태를 알아차리기라도 하면 갑자기 그렁그렁 눈물이 차오르다 쏟아질듯한 날들이었다. 사람들과 있을 땐 으하하하 웃다가 집에 돌아오는 길이나 자려고 누우면 자주 눈물이 났다. 사람들은 즐겁고, 나는 무척이나 공허했다. 바람이 가슴 한가운데로 숭숭 숭 지나갔다. 흰 바람벽이 늘 가까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술은, 내가 술을 마시고싶은 순간에 마신다. 술을 마시고싶을 때 혼자 또는 누군가와, 내가 직접 그 시간을 영위해서 마시는 것. 누구와 마실지, 무엇을 마실지, 얼마나 마실지, 내가 선택할 수 있다. 내가 선택한다. 그게 좋다. 어느 날 회식 자리에선 아무도 술을 먹지 않는 우리 테이블에서 저 맥주 마셔도 될까요, 하고선 맥주 한 병을 시켜 따르고 비웠다. 어차피 내돈내산 회식인데 눈치 보지 않고 마시는 게 얼마나 그토록 시원하던지 ! 그날 그 자리에서의 의미있는 즐거움은 오직 그 맥주 한 병이었다. 시간을 내어 애정하는 사람들과 술을 마실 때도 좋다. 어느 날은 유자하이볼을, 어느 날은 와인을, 어느 날은 막걸리를 크 ! 어느 날은 맥주를 캬 ! 마신다. 유쾌하고 즐겁다. 서로의 소중한 시간에 자리를 내어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의미있고 아깝고 귀하다.
그래 그러니까, 사랑은 그리움. 보고싶고 그리운 마음. 분명 이 순간이 지나고나면 그리워질 것만 같은 예감이 문득 드는 그 마음. 아깝고 아까워, 그리고 술은 늘 그 보고싶은 마음을 깊고 찐해지게 하며 더욱더 호방하고 강력하게 해주는 것. 층층이 쌓이고 흩어지고 유려해지는 그 아까운 시간에 술은 그 공기감과 색감을 한층 더 짙어지고 아름답게 하는 물감이다. 함께 하고 있는 그 사람이 지금 내 앞에 있을 때, 우리가 언제 또 이렇게 술을 마실 수 있을지 모르니까. 앞으로 언제까지 함께 할지 모르니까, 영영 갈 수 없는 어떤 순간이 언제 또 이토록 그리워질지 모르니까. 그러므로 마실 수 있을 때 ㅡ
지금 나는 내 앞에 있는 사람과 즐겁게 술을 마시겠다. 보고싶은 사람에게 술 한 잔 하자고 말하겠다. 기념하고싶은 날에는 어제도 없고 내일도 없는 듯 마음껏 기울여도 보겠다. 어느 고된 날은 스스로에게 한 잔 따라주겠다. 술김에 어딘가에 닿아 울고싶은 사람을 알아차려보려 하겠다. 운이 좋다면 그 틈에 나도 한 번 같이 울겠다. 사랑하는 사람과 술을 마시다 고백도 하고 또 고백도 받겠다. 아른아른 불빛 속에서 휘적휘적 함께 걷다 하하하하하 웃겠다.
지나고 보면 분명 그리워질 것 같은 그날에.
삶에서 취소힐 수 있는 건 단 한가지도 없다. 지나가는 말이든 무심코 한 행동이든, 일단 튀어나온 이상 돌처럼 단단한 필연이 된다.
ㅡ136p.
“저는 아무래도 좋습니다.“
정말 이래도 저래도 아무래도 좋았다.
ㅡ163p.
권여선, <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를 읽고 주정뱅이처럼 술에 대해 써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