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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영 Jun 21. 2022

나만 생각하고 살기로 했다

'삼종지도+일종'을 벗어나 찾은 행복

그 모든 것을 감내한 나는 대단한 사람이다.


[공자가어]에 여자가 따라야 할 세 가지 도리가 나온다. 어려서는 아버지를 따르고, 시집가서는 남편을 따르고, 남편이 죽어서는 아들을 따르라는 도리이다. 나는 조선시대 여성도 아닌데 21세기에 이 삼종지도를 내 맘대로 따랐다.


나의 감정일기에는 끄달림의 노예로 40년 충실하게 살아온 3가지 방법이 나온다. 어릴 때는 부모님을 원망했고, 결혼해서는 남편에게 모든 걸 투사했다. 아이가 자라면서 나 자신을 희생자로 만들었다. 누구도 나에게 그렇게 살라고 강요한 사람이 없었는데, 나는 진짜 나를 제쳐두고 에고에 붙잡혀 살았다. 나의 주인이 아닌 나의 노예로 성실하게 일했다. 


자기애가 강한 나르시시스트, 노래방 책자의 올디스 벗 구디스 팝송을 완창하겠다는 의지의 남자. 이루지 못한 뮤지션의 꿈을 투사해 두 주먹만으로 일어나 자신의 사업에서 스스로 레전드임을 자처하는 이 남자. 딸인 나의 용모보다는 자신의 아름다움이 먼저인 아버지 슬하에서 멀쩡하게 성인이 되었다는 게 의아스럽다. 뭐, 결국에는 견디다 못해 멀쩡한 남자를 골라 그에게 도망쳤다. 


좋은 직장 명퇴하고 자신의 꿈을 이루겠다며 사업하는 남편을 감내했다. 스스로 칭찬하고 어깨 펴고 당당하게 살아도 좋을 만큼 나는 대단한 일을 겪었다. 이보다 더 심각하고 답답한 상황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이 모든 것을 견뎌내고 짊어진 대단한 여자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같이 합심으로 기도하자는 딸을 따랐다. 믿음의 가장 자리를 나에게 선물한 딸…멋지지 않은가. 믿음의 가정을 완성하기 위해 교회를 다녔다. 6개월간 눈물로 회개하는 새벽기도를 했다. 다 담으면 참기름 한 병은 족히 나올 그 눈물들은 다 어디로 갔느냐. 이제 대학원에 가겠다는 이 발칙한 딸아이를 내가 키웠다. 이보다 더 황당하고 드라마틱한 경험은 없으리라. 나는 온몸을 던져 자녀를 키워낸 대단한 엄마다. 


누구도 나에게 이렇게 살라고 하지 않았다. 내가 스스로 택해 아버지에게 복종했고, 사업가 남편과 배우자 관계를 유지했고, 믿음의 가장이 되었다. 나는 당당한 나 자신을 누리며 행복할 권리가 있었다. 그런데 왜 원망하며 우울하게 지냈을까


이렇게 글로써 나를 만났기에 이제는 알 수 있다. 나는 나를 똑바로 볼 자신이 없었다. 초라한 나를 독대하기 싫어 비겁하게 타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이제는 인정하고 나와 화해한다. 나의 주인은 나이기에 내 선택을 존중하고, 나를 격려하고 과거의 나에게 배운다. 그러니 그들에 대한 원망은 이제 그만해도 된다. 아니 원망한 나 자신을 원망하리라.


가족을 통해서 세상에 못 할 게 없다는 것을 배운다. 가족, 그들을 견뎠기에 앞으로 견뎌내지 못할 것은 없다. 아버지에게 20년 넘게 복종했듯이 나는 나의 인생 설계에 따를 수 있다. 딸아이를 20년 키웠듯이 내가 나를 20년 동안 키워낼 수 있다. 남편 곁에서 20년을 참고 산 것처럼 나는 나의 꿈을 위해 20년 넘게 나를 변화시킬 수 있다


삼종지도+1종 옵션



내 삼종지도에 옵션 하나 추가해서 삼종+1종지도를 만들어 본다. 관계를 소중히 생각하고 적을 만들지 마라. 상사의 말과 업무분장에 나온 글들의 무게는 내가 꼭 견뎌야 하는 짐이다. 후배를 이해하고 베풀어 같은 박자로 이끌고 나가야 한다. 이런 말은 누가 한 건가. 내가 한 말이다. 나의 에고가 나에게 속삭인 말이다. 그러나 하루에도 12번씩 흔들리며 이것을 지키는 게 얼마나 힘든 건지 느끼며 되새김질한다.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왜 하필 그때 그 사람을 만난 걸까? 왜, 왜,왜냐고 허공을 향해 묻지 말자…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일어나지 않을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될 일은 된다. 안될 일은 안된다. 모나드에는 창이 없다. 모든 것은 예정되어 있다. 


살면서 트러블이라고 생각했던 수많은 일들… 겪지 않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각했던 일들…편안하고 고요하게 지내는 것 같은 사람들을 부러워한 마음들…누구도 나에게 사회생활을 그렇게 하라고 하지 않았다. 참으라고 한 적 없다. 스트레스를 차곡차곡 쌓으라고 하지 않았다. 희생할 필요 없고 이해 안 되면 따지면 되는 것이다. 


글을 쓰며 지나간 직장생활의 어려움을 견뎌낸 나를 만났기에 이제는 알 수 있다. 나는 나의 논리를 만들 자신이 없었다. 업무를 숙지하지 못한 초라한 나를 인정하기 싫어 비겁하게 그들을 속였다. 그러나 이제는 인정하고 나와 화해한다. 나의 주인은 나이기에 내 선택을 존중한다. 힘들어했던 나를 위로하고 과거의 나에게 배운다. 그러니 그들에 대한 원망은 이제 그만해도 된다. 


어쩌면 그 트러블의 메이커는 나였을 수도 있다. 문제가 아니었을 수도 있었던 것을 문제라고 말한 것은 나이다. 문제라고 해도 문제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나이다. 나는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는 스스로 서 있는 사람이다.


 지난 수 십 년 동안 내 곁에 소시오패스, 사이코패스, 또라이, 꼰대, 낀대, 빨대, 갑질상사, 안하무인 후배를 생산하며 스스로 피해자임을 자처했다. 이제 내 마음의 주인은 나이다. 나는 그들의 노예가 아니고 그들은 나를 흔들 수 없다.


 나의 행복을 타인의 손에 맡기지 마라



가끔은 사무실이 지옥 같고 가족은 질척거린다고 느낀다. 퇴직하고 이혼하고 인연 끊고 싶다. 익숙해서 그들에게 어떤 영감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의 많은 부분은 그들에게 영감을 얻었고 그들의 영향을 받는다. 그들의 시선을 느끼면서 그들을 의식하며 산다. 어쩔 수 없는 숙명이다. 창이 없는 모나드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이 비관적이지만 그 안에서도 변화는 계속 일어난다. 그 변화의 박자감으로 미래를 상상하게 되고 기대하고 희망한다. 


타인과 가족의 손에 나의 행복이 결정되지 않는다. 내가 쥐락펴락 할 수 있다. 내 손안에 있소이다. 


내 가족 내 새끼 내 남편, 직장의 그 인간들, 지긋지긋하고 얄밉다. 그러나 그 지긋지긋함, 얄미움의 노예가 되지 마라. 영원히 느끼지 마라. 나의 젊은 시절, 나의 액기스가 그들 안에 들어 있다고 해서, 그들이 뺏은 것이 아니다. 나는 나의 넘치는 사랑으로 그들에게 베푼 것이다.


이제는 나의 눈길이 나에게 향한다. 너무 사랑해서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싶었던 마음들, 속내가 궁금해 마음속을 헤집고 들어가서 어떤 마음인지 알려고 했던 일들. 그 인간들이 나를 왜 그렇게 괴롭힌 건지 따지고 싶었다. 내 인생은 왜 이리 꼬이는지 세상을 향해 외치고 싶었다. 이제, 그딴 뻘짓. 다 때려치울 것이다. 모든 영혼을 끌어모아 나는 나를 사랑하고 나를 알고 싶다.


가족에게는 무심하고 시크하게 툭툭 말을 던진다. 사무실에서는 말이 통하지 않으면 화를 낸다. 싫으면 싫다. 아니면 아니다. 저건 저거다. 이건 이거다. 따지고 논리로 반박한다. 친절한 주무관, 딸, 엄마, 마누라는 사라졌다. 


나에게 사랑과 관심 어린 안부를 전한다. 용기와 희망의 메시지를 보낸다. 내가 그들에게 보낸 시간보다 어쩌면 더 차고 넘치게 나에게 갖다 바칠 것이다. 앞으로 내 행복을 그들의 손에 맡기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 삼종지도는 없다. 삼종지도+1종도 없다.


나는 나에게 속삭인다. 오랫동안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우리는 너무 자주 자신의 행복을 타인의 손에 맡긴다. 고압적인 상사나 변덕스러운 친구, 인스타그램 팔로어 같은 타인의 손에. (중략) 에픽테토스는 모르는 사람에게 자기 몸을 맡기는 상황을 상상해 보라고 말한다. 터무니없지 않나? 하지만 그것이 바로 우리가 매일 마음속에서 하는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주권을 타인에게 이양해 그들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게 만든다. 그들을 몰아내야 한다. 지금 당장.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세상을 바꾸는 것보다 스스로를 바꾸는 것이 훨씬 쉽다.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p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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