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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영 Jun 09. 2022

술은 언제 끊을 거냐는 질문

술을 사랑함은 나를 사랑하고, 그대를 사랑하기 위함이다.

가볍게 견디게 해주는 힘

인생의 힘든 시절을 겪어 본 사람은 알고 있다. 무엇이 그것을 견디게 해 주는지. 그건 바로 나 자신이다. 내 안의 진짜 나와 가짜 나를 분별하고, 가짜에게 속지 않기로 결단한다. 진짜 내가 그것을 견딜 수 있도록 도와 준다.


아주 힘든 일, 미치도록 싫은 사람이 아니라면, 이런 결단 없이 가볍게 견뎠으면 하고 눈을 살짝 감는다. 감은 눈의 시선은 내 방 머리맡에 다과상으로 향한다. 어제 마트에서 구입한 팩 사케를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반은 견딜 수 있다. 나머지 반은 오늘 밤 사케를 마시는 순간 사리질 것이란 예감이 든다.


사무실에 음악이 흐른다. 올해 3월부터 같이 근무하는 90년대생 주무관이 랜덤으로 틀어 놓는 음악이다. 난 늘 술이야... 맨날 술이야... 널 잃고 이렇게 내가 힘들 줄이야. 이젠 남이야 , 정말 남이야...


어? 술? 귀가 솔깃하다. 노래 가사에 이렇게 화답하고 싶다.


난 늘 술이야.. 맨날 술이야..

 ANSER: 맨날 술은 당연한 거 아니야. 난 늘 술이지, 그렇지 난 늘 밤이면 술이지


널 잃고 이렇게 내가 힘들 줄이야.

ANSER: 널 잃고 이렇게 힘든 게 아니고, 원래 사람이 사는 게 힘든 거야. 힘들게 사는 게 맞는 거야


이젠 남이야 , 정말 남이야...

ANSER: 원래부터 남이지. 세상에 원래 나밖에 없는 거지, 그게 자유지


술 없는 오늘 밤은...


술 없는 내 인생은 말이야… 술 없는 내 밤은 … 바보같이 그런 걸 상상하다니. 상상이 현실로 바뀌면서 질문해 본다. 이 좋은 술을 누군가 끊으라고 한다면? 언제 끊을 꺼냐고 질문한다면?


최근에 철학에 관심을 가져 구입한 책이 있다.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이다.

"질문을 살아요?" "네. 질문을 사는 겁니다. 오랜 시간 마음 한구석에 질문을 품는 거예요. 질문을 살아내는 거죠. 단순히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너무 자주 해결책을 찾아버려요." 에릭 와이너,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어크로스(2021), p69

질문을 살아가라니. 이거 너무 멋진 말이냐. 그래 질문을 살라고 하니, 다시 한번 질문해 본다. 이 좋은 술을 누군가 끊으라고 한다면?


나에게 술은 언제 끊을 거냐고 묻는 사람은 없었다. 이런 질문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하기 싫은 일을 하게 하는 힘

나는 혼자 조용히 술을 마신다. 불을 끄고 그것도 모자라 눈을 감고 술을 마신다. 다음 날 어김없이 새벽 명상을 하고 글을 쓴다. 전날 밤 마신 그 사랑스러운 술은 너무 사랑스러워 다음날 나를 사랑스럽게 한다. 나는 행복한 사람이 되고 그 행복이 내가 하기 싫은 일을 할 수 있는 힘을 준다. 그래서인지, 나에게 술을 언제 끊을 거냐고 말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아… 의사가 매일 마시지 말고 주 3일로 바꾸라고 한 적은 있다. 그러나 그는 질문을 한 것이 아니다. 부드럽고 엄하게 권고를 한 것이다. 질문에 대한 대답을 자꾸 미루게 된다. 아 대답을 해야 하는데…



퇴근 길이 꽃길이 되는 길


사무실 근처 롯데마트가 있다. 이 고장 철원에 유일한 대형할인점이다. 그 넓디넓은 대형할인점에 들어서면 바로 가는 곳은 구석진 곳의 주류 코너이다.


일렬로 착하게 줄지어선 와인병들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든다. 보르도 지역 와인 앞에 서서 눈을 감는다. 프랑스 정부의 초정을 받은 국빈이 되어 와인처럼 붉은 카펫 위를 걷는다. 벌써 혓바닥에 와인의 쌉쌀한 감촉이 느껴진다. 5900원짜리 와인이 주는 이 감동이란.. 만 원짜리 와인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행복하다.


그러나 오늘은 아니다. 오늘은 따뜻하게 사케를 마시고 싶다. 사케 옆 고량주가 물끄러미 쳐다본다. 그래 아니다 오래간만에 독하게 마셔보자..


고량주 2병, 팩 사케 1병, 유산균 음료 1팩, 고무장갑 1개, 카드 결제 완료

일본 여행은 내일 떠나자. 이랏샤이마세~ 오늘은 뜨겁게 34.2도로 가보자.


병나발이나 빨대로 마시는 걸 좋아한다. 그러나 고량주는 독해서 무조건 소주잔에 마신다. 양 조절 잘 못하면 아까우니까.


아 질문에 대한 답을 해야지.. 술은 언제 끊을 꺼냐는 나의 질문. 아 모르겠다..


제텔카스텐 메모법을 활용해서 일단 임시메모장에 이 질문을 넣자. 술은 언제 끊을 꺼냐.. 그 임시메모에 쑤셔 넣고 가끔 상기시켜보자. 언젠간 답이 나오겠지.. 뭐 술김에 삭제해도 모른다.


질문에 꼭 답해야 하는 건 아니다.



나를 사랑하고 그대를 사랑하기 위하여~


나는 술을 좋아한다. 사랑한다. 뭐 사랑한다고 그 사람을 다 아는 건 아닌 것처럼... 술을 좋아하고 사랑하지만 잘 알지는 못한다. 또 사랑하는 것이 있다. 나는 시와 음악을 사랑한다. 사랑하니까 시가 무엇이냐. 좋아한다면서.. 음악이 무엇이냐라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남편을 사랑한다고 남편을 속속들이 다 알고 있을까? 사랑하니까 알고 싶다. 그러니, 남편 가슴을 찢고 그  안을 들여다봐야겠다. 그렇다면 그건 폭력이다.  시를 잘 알지도, 잘 쓰지도 못하고, 음악을 잘 이해하지도, 연주하지도 못한다. 그러나 시와 음악을 생각하면 가슴이 뜨거워지고, 삶이 풍성해진다. 시와 음악과 함께하는 순간, 내 모습이 아름다워지는 것을 느낀다. 그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로 시와 음악을 사랑한다.


시와 음악을 사랑하는 방법으로 술도 좋아한다.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들로 인해서 내가 싫어하고 힘들어하는 일을 할 힘을 얻는다.


나는 일하기 싫고, 인간관계가 힘들다. 하지만 나는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들로부터 위로와 자신감을 얻고 다음날 출근한다.


술은 내 안의 강한 나 자신을 사랑하고, 그대도 사랑할 수 있을 자신감을 준다. 나는 그것을 느낄 수 있다.

보여주기 위한 것도, 인정받기 위한 것도, 아니다. 술을 사랑함은 나를 사랑하고, 그대를 사랑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오늘도 술을 마시는 사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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