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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영 Jul 23. 2022

불안합니다만, 자유합니다

하이데거 불안과 죽음

넌 못할 거야


사람들은 왜 이따위 말들을 지껄이는 걸까?


‘야. 니가 무슨 하루키인 줄 알아’

‘그게 되겠어? ‘아무나 되는 줄 아나 봐’

‘걍 하던 대로 해’


그들은 나를 자신의 수준보다 아래로 끌어내려야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인가.  가족도, 친구도 예외는 아니다. 걱정이라는 포장지를 풀면 보이지 않는 폭력의 기류가 저 밑바닥에 깔려있다.  


영화 '<행복을 찾아서>에서 주인공 가드너가 아들이게 이런 말을 한다.

“넌 못할 거라는 말, 절대 귀담아듣지 마. 그게 아빠 말이라 해도... 꿈이 있다면 지켜야 해. 사람들은 자기가 못하는 건 너도 할 수 없어.라고 하거든. 원하는 게 있다면 쟁취해. 반드시.”

과연, 아들은 아버지의 말조차 듣지 않고 호기롭게 자신의 꿈을 위해 달려갈 수 있을까. 



 ‘넌 못할 거라는 말은 절대 듣지 마’ 라고 나에게 누군가 말해주면 좋으련만... 역시 영화는 영화고 현실은 현실이다.


하이데거의 비본래적 실존

우리는 원치 않게 세상에 던져진, 그러니까 피투 된 존재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피투성이로 피투 된 존재로 세상에 던져졌다. 어떻게든 살아야 하니 세상 안에 살면서 세상 사람들의 요구에 맞춰 생활하고 그것에 익숙해질 수밖에...  그렇게 하이데거가 말한 평균적 일상성이라고 부르는 일상적 경험을 하며, 현 존재로써 세계 안에서 세상 사람들과 같이 살게 된다. 


나 자신의 가치는 사라지고, 세상이 인정하는 가치를 자신의 고유한 가능성으로 여기게 된다. 세상이 원하는 것을 내가 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것을 잡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내 의지라고 느끼고 판단하지만 실제로 세상이 마련한 기준에 따른다. 하이데거는 이런 ‘나’를 비본래적 실존이라 부른다.  고유한 가능성을 세상의 잣대로 착각하며 사는 것이다.


어느 순간 나는 세계 안의 존재로 마주치는 사물들에게 속박되고, 그것의 노예가 된다. 그것들의 관계에 의해 ‘나’ 자신은 소모되어 버린다. 나는 본래 진정한 특성을 가진 존재였지만, 세상 사람들에 의해 닳고 닳아 비본래적 실존이 되었다. 나는 어디에 있는 걸까. 하이데거가 말하는 비 본래적 실존이 아닌 진정한 존재로서의 나를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불안


 하이데거는 주저 존재와 시간에서 평균성을 조장하는 세상에 대해 말한다. 세상 안에서 우리는 평균적 일상적 경험을 한다. 각자의 고유성을 상실한 채로.. 그렇게 살게 된다고... 비본래적 실존으로 말이다. 그러다 보면 남과 비교하고 경쟁하게 된다. 한편으로 질투심과 폭력의 속내는 감춘 채 어른인 척하며 배려하고 이해하는 사회생활을 한다.  



그렇게 달리다가, 어느 순간 멈칫하는 때가 있다. 


누구나 한 번씩 인생의 힘든 시절을 겪게 된다. 누군가는 현타일 수도 있고, 누군가는 배신, 패배 일수도 있다. 현명한 사람이면 성공 후의 허망함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하이데거는 이점에 주목한다. 이러한 것을 그는 불안이라 부른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이런 불안감에 맞서지 못하고 도망가기 바빴다. 내가 주로 써왔던 방법은 투사였다.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미워함으로써 불안을 극복하려 했다.  그래서 삼종지도에 따라 아버지를 원망하고, 남편을 미워하고, 자식에게 화풀이했다. 


또 다른 방법은 술이었다.  아주 힘든 일, 미치도록 힘든 사람이 아니라면 투사보다는 가볍게 술로 해결했다. 눈을 감고 팩 사케를 심상으로 바라만 봐도.. 불안의 반은 해결되었다.


이런 방법으로 진짜 나와 가짜 나를 분별하고, 가짜에게 속지 않을 수 있을까? 불편하고 힘들지만, 언제나 삶의 터닝포인트는 여기에 있다. 내가 왜 힘들고, 왜 기분이 나쁘고 , 왜 그 사람이 미운지 생각하는 바로 그때이다.  그런 사유를 통해 분명히 배우고 성장할 기회가 숨어 있다는 것을 아는 순간,  나를 힘들게 한 그 쓰레기 같은 상사, 그 싸가지 없는 후배, 주는 거 없이 싫은 그 사람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이런 것들을 다 불안이라 하고 그 불안이 찾아올 때 자신의 본래성을 회복하는 출발점이 된다고 했다.  일상적인 세계가 무의미해지고,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드러내는 세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다. 불안은 결국에.. 종국에는 죽음에 대한 불안이기 때문이다. 


죽음


아버지로부터 x염색체를 받아 어머니의 x염색체와 만난 그 순간부터, 신체 구성물질이 분해되어 새로운 별의 재료로 쓰이는 그날까지, 모든 수수께끼를 가장 강하게 느끼게 되는 것은 죽음을 의식할 때이다. 누구나 경험이 있으리라. 가장 힘들 때 느끼는 감정은 '에라 모르겠다. 팍 뒤져버릴까'이다. 죽으려 맘먹고 옥상에 올라갔다가 아이패드 할부금, 친구한테 꿔준 돈, 내일까지 낼 공과금... 이딴것들을 생각하며 내려온다. 


이렇게 힘든데, 죽을 수도 있고, 죽지 않을 수도 있는 이 상황, 그 순간 가장 불안하다는 것을..


하이데거는 죽음을 바라보라고 한다. 미리 죽음을 상상하고 그 끝을 가보라 한다. 이를 '죽음의 선구'라고 한다. 


자유


못할 거라는 말에 나의 비인격적 정체성, 그러니까 남들의 기대에 지향하는 나는 드디어 피난처를 찾음으로써 진정한 나 자신을 회피한다. 나는 마땅히 해야 하는 대로 달려갈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나는 유일하고 탁월하게 되리라는 촉구를 스스로 억압하며, 평균인의 차원으로 끌어내리고선, ‘인생이 뭐 다 이런 거지’라며 자위한다.


그러나 그 순간 불안이 찾아온다. 그 불안은 죽음을 연상시키며 내 삶을 나의 죽음과 분리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나는 그 불가능 안에서 그 불가능성을 벗어나고자 시도한다. 이것을 알아차려야만, 그러니까 불안이란 감정을 알아차리고 인정해야  세상의 기대와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나는 나의 한시성을 부인하고 그 안에서 비로소 진정한 자아를 긍정하는 해야만 한다.


진정한 자아를 긍정하면, 나는 무엇이며 누구인지를 투명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 그렇게 할 때 나는 깨닫게 된다. 나는 이 모든 것들로부터 지속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들을 이루고자 노력해왔다는 사실을… 나의 제약과 한시성을 숨기고자 계속 노력해왔다는 것을…


이제 불안 안에서 나의 모든 행위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긍정할 것이다. 이렇게 인정하고, 긍정할 때야말로 스스로 나의 삶을 변형시킬 자유함을 충만히 느낄 수 있다. 그 자유에 대한 책임을 지고 스스로 결정을 내려 진정한 자아가 되는 길로 간다.


그러므로 나는 불안이라 쓰고 자유라고 읽는다. 나는 자유인이기에 불안한 것이다. 그 무엇도 될 자유가 있기에 나는 그 모든 것들로 인해 불안한 것이다. 그 자유를 만끽하며, 불안에 떤다.


가드너의 아들은 꿈을 지킬 것이다.

부모든, 배우자든, 친구로부터 그 꿈을 지킬 것이다.

그 누구의 말에도 불안하겠지만, 자유로울 것이다.




글을 읽기 힘든 분을 위한 오디오파일을 첨부합니다.






<철학하는 뇨자>2화 술은 언제 끊을 거냐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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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하는 뇨자> 1화 나만 생각하고 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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