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설게 보기, 그리고 거리두기
목표
꽤 오래전부터 무언가를 위해 계속 노력했었다. 과거형이니 지금은 아닐 터… 목표라는 걸 만들어 이미지화 하고 그 점을 향해 달렸다. 그 점은 계속 변했다. 공부로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취미로 뻗었다가 멈추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목표란 것은 나 자신의 선택이 아니다. 타자의 시선을 의식한 허세다. 그것은 노예근성을 예쁘게 담은 그릇이다. 예쁘게 보이는 그 결과가 하나씩 만들어지면 신이 난다. 한쪽에서 진짜 내가 소멸하는 걸 모른 채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나라는 존재가 마모되어 사라지고 있다.
노예
스스로 만든 프레임에 나를 가두고 갇힌 줄도 모른 채 웃고 있다. 그 빌어먹을 목표. 목표가 꼭 있어야 한다. 열심히 살아야 한다. 그 프로그램 안에서 엔터키의 채찍을 맞으며 40년을 넘게 살았다. 덕분에 진짜 노예가 되어 47살인 지금도 하루에 8시간씩 자유를 반납하고 그 대가로 월급을 받고 있다.
이렇게 노예 어쩌고 떠들고 있는 걸 보니, 이제는 아닌가 보다. 노예가 노예인 걸 알게 되면 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이다. 노예인 것을 자랑으로 여기거나, 고개 빳빳이 들고 주인에게 대드는 거다. 나는 이제 주인에게 대들다가 귀싸대기 맞고선 생각한다. 언젠가 미친개처럼 주인을 물고 도망치리라…
자유
이제 마음 한구석에서 자유를 갈망하는 내가 새로 태어난다. 하지만 자유에 따르는 불안도 겪어야 한다. 그 불안과 함께하는 목표 없는 나의 공부와 취미를 소개하고 싶다. 나의 노력이란 것의 모양은 어떠한가. 그 시절의 모양과 다르다고 우기고 싶다.
거리두기
언젠가 일본 여행을 다녀온 후 공부하기 시작했다.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향해 달렸다. 그 목표란 것은 금방 달성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 나는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아무것도 없다.
지금도 여전히 일본어를 말한다. 공부라고 할 수도 있을 테고, 취미라고 우길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름 붙일 수 없는 그 무엇으로 느낄 수 있다. 그건 하나의 거리두기이다. 닳고 닳은 내 삶과의 거리두기...
하루하루 삶을 견디고, 그것을 목도하면 온갖 망상에 사로잡힌다. 특히 인간관계 속에서 여러 감정에 끄달리고 어떻게든 생각이란 걸 통해서 정리하려고 한다. 그 생각이란 건 결국, 언어의 틀 안에 놓이게 된다. 하이데거는 우리의 일상 언어가 오염되어 그 오염된 언어로는 철학을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스스로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 자신의 철학을 표현했다. 그의 철학을 표현하는 언어는 자신의 모국어인 독일어로 만든 단어지만, 독일 사람들은 하이데거의 책이 언제 독일어로 번역되냐며, 그의 언어를 외국어 취급했다.
끄달림
나는 하이데거처럼 새로운 단어를 창조할 능력이 없기에 써먹을 데도 없는 외국어로 내 오염된 일상언어를 회복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마모된 기존의 생각이 아닌 새로운 사고를 통해 끄달림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못된 사람인가? 마음을 몰라주는 사람인가?
2년 전쯤 아는 동생에게 기타를 받았다. 사놓고 쓰지 않아, 자리만 차지한다며 평소 악기에 관심 많은 나에게 주겠다고 했다. 사례로 그녀와 그녀의 친구를 불러 식사대접을 하고 기타를 받았다. 그 후로 연락이 뜸했다. 그런데 갑자기 기타를 아직도 치고 있냐는 메시지가 왔다.
덕분에 잘 사용하고 있고, 실력도 늘었다고 했다. 그런데 기타를 빌려달라는 거다. 기타를 받은 사례로 같이 식사한 그녀의 친구가 기타 수업을 등록했다며… 나는 순간 빌려달라는 의미를 생각했다. 빌리는 것은 잠깐 빌리는 것인가. 몇 달을 빌리는 것인가. 몇 년을 빌리는 것인가.
어차피 언젠가는 픽업을 장착한 오케스트라 모델을 구입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쿨하게 그녀에게 기타를 새로 구입할 예정이니 돌려주겠다고 했다. 나는 또 순간 '돌려주겠다'는 의미를 생각했다. 돌려주는 게 아니라 뺏기는 거구나. 기타를 받은 사례를 했기에 이 기타의 정당 소유주는 나란 말이야..
마음이 불편한 나는 전화로 일본 선생님께 구구절절 이야기했다. 그러다가 수업시간 20분을 거의 채웠다. 수업을 마무리하며 말했다.
私、韓国語で못된사람なんです
何だろう。못된사람という言葉ないですね。
彼女の気持ちを分かってあげられない人と 言いますね。。。
나 : “저 못된 사람인가 봐요”
선생님: “뭘까요.. 못된 사람이란 말 없어요. 그런 말은 없고..
그녀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말해야 하네요.”
전화를 끊고 오염된 일상어가 아닌 일본어로 생각해본다. 나를 못된 사람이 아닌, 그녀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는 사람으로 생각해 본다.
‘그녀의 마음은 무엇일까? 이런 핑계로 신앙과 멀어진 나를 만나고 싶은 걸까… 나의 방황하는 모습이 보기 안타까웠던 걸까… 기타를 빌려준 거라고 착각하는 걸까… 내가 이깟 기타 하나 때문에 말이야, 내가 돈이 없어, 가오가 없어… 그녀에게 받은 기타보다 몇 배 더 비싼 기타를 사야겠다. 계산적인 내 본심을 들키지 않고 우쭐한 마음은 보이고 싶네… 그녀에게 기분이 나쁜 건지. 그깟 기타 하나에 끄달리는 자신에게 기분이 나쁜 건지 모르겠네. 머리가 아파오네… 악기 같은 건 받지 말고 그냥 내 돈 주고 사는 게 상책이다. 나는 야~ 참 계산적인 사람이네.’
나는 그녀의 마음도, 내 마음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일본어로 대화하면 새로운 생각이 떠오른다. 내 삶이 낯설게 보이고, 상황을 멀리 떨어뜨려 볼 수 있게 된다. 평일 20분씩 에이코 선생님과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고 하루 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하면 그냥 떠든 것 만으로 묘하게 마음이 정리된다.
노력 VS 노력
언제였던가. 선생님과 취미나 공부에 대해 나누다가 勞力와 努力을 배웠다. 나는 내 지금의 노력을 勞力(로우료꾸)라 부르고, 과거의 노력을 努力 (도료꾸)라 부르고 싶다.
우리말은 발음이 같지만 일본어는 다르게 발음한다.
努力(도료꾸)
한자의 뜻까지 깊숙이 들어가면 내 과거의 노력, 도료꾸의 ‘노’ 자 안에는 여종의 의미가 있다. 노예는 주인에게 복종하는 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인 후에 노력한다.
여러 도료꾸 중 하나였던 서예, 아~ 나는 그 아름다움을 단지 무언가 멋져 보이고, 타인에게 자랑삼아 소비했던 것이다. 그렇다. 과거의 도료꾸는 보여주고, 증명하고 싶은 마음의 발로였다. 세상을 향해서 '나 이런 사람이야 나 이렇게 노력하고 있어'하는 발악이었다.
勞力(로우료꾸)
지금의 노력, 로우료꾸의 ‘노’ 자에는 불 화 자가 두 개 있다. 불을 밝힌 채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다. 여기까지 썰을 풀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든다.
지금의 로우료꾸는 단지 양태로 존재한다. 노예의 마음을 빼고 힘만 쓰는 지금의 노력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살아있기에 감각되는 것들을 삶으로 받아들이고 버티는 그 모습 자체이다. 도토리를 바라보는 다람쥐의 모습이다. 아기가 엄마의 젓을 향해 손을 뻗는 마음이다.
그래도 과거 노력, 도료꾸의 결과물 중 하나인 서예를 하면서 배운 한자가 이럴 때 유용하게 쓰이는 걸 보면, 그 시절의 뻘짓도 지금의 로우료꾸에 보탬이 된 것도 같다.
목표없는 나의 공부
어느 날 꽃을 보면서 이 꽃을 보기 위해서 내가 이 땅에 태어난 것 같다는 그런 느낌이 든 그날부터 나는 도료꾸가 아닌, 주어진 삶을 그냥 살고 있는 것이다. 꽃이 핀 것처럼 나무가 열매를 맺는 것처럼 나는 그냥 살아가는 것이다.
목표의 이미지로 일본어를 공부할 때는 그것을 통한 무언가가 없었다. 지금은 자유롭게 그러나 불안하게 공부하면서 많은 것이 변했다. 마음 한구석에서 자유를 갈망하는 내가 새로 태어난다. 하지만 자유에 따르는 불안도 겪어야 한다. 그 불안과 함께하는 목표 없는 나의 공부와 취미 그리고 나의 노력은 계속될 예정이다.
글을 읽기 힘든 분을 위한 오디오파일을 첨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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