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안의 여자, 여자 안의 남자(ft. 구스타프 클림트_ 키스)
나는 왜 이 그림에 빠진 걸까 1
클림트 안에 있는 것이 나에게도 있다
그림 안의 남자와 여자를 다시 보았다. 남자는 직사각형 패턴의 남성미가 느껴지는 옷 입고 있다. 그 펑퍼짐하고 실루엣이 드러나지 않는 옷은 클림트가 평소 자주 입던 옷 같다. 애밀리가 직접 디자인했다던 그 옷. 안에 속옷을 입고 다니지 않았다는 그 옷 말이다.
여자는 원형 패턴의 여성미가 흠뻑 담겨 있는 옷 입고 있다. 여자는 무릎을 꿇고 있다. 남자는 그냥 서있다. 그러고 보면 여자가 키가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클림트보다 에밀리의 키가 더 크게 보인다.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이 키가 제일 눈에 띄었다. 그것은 아마도 키 큰 남자에 대한 나의 환상 때문이 아닐까 한다.
남자의 직사각형 패턴, 여자의 동글동글한 원형 패턴이 각각 남자와 여자의 실루엣을 나타낸다. 그런데 이도 저도 아닌 패턴이 보인다. 여자의 원형 패턴과 닮은듯하지만 다른 원형 패턴은 여자의 발뒤꿈치부터 시작해 여자의 머리를 지난다. 그리곤 남자의 머리에서 어깨까지 둘러싸고 있다. 이 다른 원형 패턴의 실루엣은 남자와 여자를 에둘러싸고 있다. 그것 또한 어떤 형상으로 보인다. 잘, 아주 잘 이으면 하나의 우뚝 선 모양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나는 왜 이 그림에 빠진 걸까.
그림 안에 그것이 있고 그것 안에 있는 것이 나에게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클림트의 남근이다. 클림트가 이런 남자의 성기를 표현하기 위한 연습의 흔적이 있다고 전해진다. 남근 안에 들어있는 남자와 여자가 이제는 보인다. 남근 안에 꼭 끌어안고 있는 남자와 여자가 있다. 그 안에서 둘은 싸우지 않는 사이좋은 연인이다. 내 안에도 있는 연인, 그대에게도 있으리라. 벨베데레 상궁의 키스 앞에서 키스하는 이 연인들 안에도 있으리라.
구스타프 클림트와 이름도 비슷한 분석심리학자 칼 구스타프 융의 안에도 있으리라. 그가 말한 아니무스, 아니마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아니무스는 여성 안의 무의식적인 남성, 아니마는 남성 안의 무의식적인 여성이다. 양성성이라고 말할 수 있으려나. 내 안에 남자, 여자 있고, 너 안에 여자, 남자 있다.
클림트는 자신의 성기 안에 있는 여성과 남성, 모두를 이 키스를 통해 보여주었다. 남근 안의 여성은 남성에게 싸우라고 유혹하고 남성은 여성의 유혹으로 용기를 얻는다. 남근 안의 남성은 여성으로 인해 용기를 얻고 여성은 남성으로 인해 존재를 증명해 보인다. 남근 안의 남성과 여성은 화해하고 서로에게 협력한다. 이제 남근 안의 남성은 그동안 자신을 스스로 억압했던 모든 것들로부터 독립하고 자유하게 된다. 그가 오스트리아 주류 미술계에서 성난 반항아처럼 분리주의 그룹을 만든 것처럼….
양성성
클림트가 분리주의를 만들고 자유롭게 일어섰다면, 나는. 나는 이 그림을 통해 무엇을 볼 것인가. 나도 자유롭고 싶다. 클림트의 시대나, 지금이나 자신이 가지고 태어난 성별에 대한 정체성이 장려된다. 그 정체성이 강할수록 순종적인 구성원이 되며, 그 정체성을 표현할 물건을 충성스럽게 구입한다. 자본주의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그렇게 진화했다. 하지만 개인의 정신건강의 측면에서 본다면 양성의 특징을 골고루 가진 사람이 더 건강하다고 볼 수 있다. 자신의 성적 정체성에 집착이 강하면 보이는 것에 치중하며, 내면이 사라진다. 자신은 빈 껍데기가 되고, 배우자, 자식, 타인만 남는다.
남자 같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 나는 자본주의 삶을 견디고 있는 여자다. 클림트를 이해하지 못했을 때, 나는 남자, 여자 모두로부터 공격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이 공격이 아닌 부러움과 불편함의 표현임을 알았다.
남자들이 나를 부러워한다. 머리카락을 다시 돋게 할 수만 있다면 1억까지 내놓겠다는 그들은 빽빽하고 까만 머리숱을 탐낸다. 빗질도 잘 안 되는 덥수룩한 스타일, 그게 뭐라고 소원하는가. 그 첫 번째 남자는 남편이었다. 처음 짧게 커트했을 때 그는 현관문을 열고 내 얼굴 내 머리를 보고 문을 확 닫아버렸다. 한동안 내가 문을 두드려도 열어주지 않았다. 분명 내 머리숱을 부러워함이다.
여자들이 나를 불편해한다. 여자의 적은 여자이며 같은 여자에게 더욱 여성다움을 요구하는 것도 여자다. 꾸안꾸가 아니다 (꾸민 듯 꾸미지 않은 듯).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런 나는 그들에게 불편한 존재다. 남자들의 부러워함은 결딜 수 있지만, 여자들의 불편해함은 견디기 힘들다. 나는 그녀들에게 말하고 싶다. 내가 남자 같은 것은 그냥 생긴 것이 아니라고.
남성성과 화해를 위한 나의 노력
여자다움을 요구하는 여자들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의 당당한 남성성은 내가 노력해서 만든 것이다. 노력하지 않으면 여성성에 치우쳐버린다. 칼 융의 말을 빌리면 나는 양성성을 유지하기 위해, 내 안의 남성과 화해하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나의 여성성은 자신을 자꾸 드러낸다. 스타일 추구라는 피켓을 들고 싸우자고 덤빈다. 나의 여성성은 사회에서 요구하는 스타일에 중독되어 따라하고 싶은 어린 아이다. 사회에 대한, 타자에 대한 시선의 의식이다. 그래 놓고선 그것을 자신의 스타일이라고 우긴다. 다행히 남성성을 받아들임으로써 타자의 시선에 묶여 있는 나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내 안의 억압되었던 긍정적인 남성성을 풀어주고, 그 존재를 회복시켜 주었다. 더불어 온화한 여성성도 증명할 수 있었다. 내가 자유하는 길은 남성성과 화해하고, 나 자신과 화해하는 것이다. 여성성이 짓누르고 있는 남성성을 회복하고 나서야 나를 누르고 있던 억압으로부터 벗어났다. 드디어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나는 내 안에 남자, 여자의 정체성을 다 두기로 했다.
우리의 정체성은 자기 주위에 무엇을 두기로 선택하느냐에 크게 좌우된다. 주변에 무엇을 두느냐는 선택이다. 철학은 우리가 내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선택을 겉으로 드러내 보인다. 어떤 것이 자신의 선택임을 깨닫는 것은 더 나은 선택으로 향하는 첫걸음이다. 독일 작가 헤르만 헤세가 말했듯, “일하는 동안 곁에 두기 위해 처음으로 작은 꽃을 꺾은 사람은 인생의 기쁨에 한 발짝 다가간 것이다.”
p347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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