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을 품고 그림을 살아내다.(ft. 구스타프 클림트_ 키스)
나는 왜 이 그림에 빠진 걸까?
2년전 레플리카 전시회에서 이 그림을 보고 정신이 나갔다. 왜 그랬는지 설명할 수 없었다. 진품도 아닌 모작을 보려고 매일 퇴근 후 그 곳을 찾았다. 전시회가 끝나고 직구로 레플리카 몇점을 구입해 집에 걸어놨다. 한동안 이 그림을 보면서 책을 읽고, 차를 마셨다.
나를 멍하게 만든 그 그림은 구스타프 클림트의 KISS이다. 클림트는 1908년 걸작 KISS로 정점을 갈무리하고 후배 화가양성에 힘쓰는 아름다운 마무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생전에 이미 거장이었는데 의외로 속옷을 입고 다니지 않고, 고양이 오줌을 픽사티브로 사용하는 기묘한 남자였다. 화실에는 반라의 모델들이 돌아다녔고 사후에 14명의 여성이 친자소송을 냈다고 한다. 이 전설적인 화가에 나는 한동안 매료되었다.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복제되었다는 KISS. 내 눈과 마음은 그 그림에 저당잡히게 되었다. 여자보다 작은 키의 남자가 있다. 남자는 정복욕을 담아 여자를 힘껏 끌어안는 듯하다. 여자는 내맡기는 듯, 손가락 끝을 살짝 말아 쥔다. 왜 이 여자와 남자에게 끌리는지 이유도 모른채 시간이 흘렀다. 어느 순간 KISS에 집착하는 내 모습이 변태같이 우수꽝스럽게 느껴져 그만, 그림을 치워버렸다.
그렇게 KISS를 잊고 지내다가 최근에 다시 펼쳐보았다. 인문학동아리에서 클림트에 대한 발표를 맡게 된 것이다. 눈에서 멀어졌던 KISS를 심안으로는 계속 봐왔던 걸까. 그림 안의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 안목을 놓치기 싫었다. 내가 왜 이 그림에 집착했는지 이제는 정말 알고 싶다.
질문을 품고 그림을 살아내기
클림트는 세기말과 세기초의 삶을 견뎌낸 남자다. 그 견뎌낸 무게가 무색하게도 그는 고립된 섬처럼, 전무후무한 화가가 되었다. 모더니즘의 박자감에 클림트는 떠밀렸다. 이후, 더이상 클림트처럼 춤추는 화가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 흐름 안에서 살아 움직이다가 박제가 되어버린 그는 무얼 말하고 싶었던 걸까. 나는 또 그를 통해 무엇을 느끼고 싶은 걸까.
그림속 여자는 아마도 클림트의 연인 에밀리일 것이다. 그녀는 100명이 넘는 직원을 거느린 커리어우먼이었다. 남성의 도움없이도 당당한 이 여자. 그리고 그녀의 한 남자인 클림트를 상상했다. 그는 세기말의 분위기와 함께 당당한 그녀앞에서 위기감을 느꼈을터이다. 클림트 뿐 아니라 당시 남성들은 수 많은 애밀리같은 여성으로 인해 불안감에 떨었을 것이다. 클림트는 변화의 바람앞에 꺼질 것 같은 자신과 에밀리를 KISS에 담지 않았을까. 그림을 그리며 어떤 마음이었을지… 21세기의 박자감에 맞춰 사는 나는 질문을 품어본다. 마음속 한켠에 클림트에 대한 질문을 품고 그림을 살아내기로 했다.
그러나 질문을 품고 그림을 살아내자는 멋진 표현을 혼자서 이루지 못했다. 결국 몇 권의 책을 통해 내가 원하던 답을 만났다. 꽃모양이 어떻고, 배경 색깔이 어쩌고, 손모양이 저쩌고, 이런거 말고, 진짜 에로티시즘을 파고드는 질문과 답 말이다. 그 질문을 통해 그림을 살아낼 수 있었다.
나는 왜 이 그림에 빠진걸까? 그것은 클림트의 성기 안에 있는 것이 나에게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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