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말서고 뭐고 퇴사나 할걸

폭풍 같았던 첫 회사

by 윤 yoon


스물여섯, 그럴싸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패션디자인과를 졸업하고, E사 의류 브랜드 스토어에서 현장 아르바이트를 겸하며 취업 준비를 하던 나는 모 의류 쇼핑몰에 정식으로 입사를 하게 됐다.


아이보리색 벽지에 체리 우드 몰딩, 2~3개 딸린 각각의 방, 구석의 좁은 싱크대, 그 옆에 더 좁은 실내 화장실 하나. 낯설지만 이상할 만큼 친숙한 이 공간은 좁은 가정집을 사무실로 개조한 듯했다.


통상 거실이라고 칠 법한 중앙 공간엔 색상도, 높이도, 어느 하나 맞는 구석 따위 없는 책상들이 얼기설기 붙어 있었다.


이는 내가 생각하고, 혹은 상상했던 전형적인 '사무실' 혹은 '회사'의 이미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사회초년생으로서 이제 막 첫 발을 내딛은 나는 아직 실망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첫 월급은 100만 원이었다. 월급날에 맞춰 나오는 일은 없었지만, 아무튼간에.


약속된 월급일, 그 일주일 전후로는 내내 대표와 팀장을 쫓아다니며 '월급은 정확히 언제 나오나요?' 달달 볶아야만 했다. 그래야 간신히 2주까진 넘기지 않고, 월급을 받을 수 있었다.


회사에서 정한 출근 시간은 오전 9시.


하지만 이를 지키는 사람은 놀랍게도 이 회사에서 나 하나밖에 없었다. 처음엔 내가 출근 시간을 착각했나 싶기도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나 빼고 모든 사람들이 느지막이 오전 10시부터 출근을 하겠는가.


그래서 확인차 물어봤다.


"팀장님, 저희 출근 시간 오전 9시 아닌가요?"


11시까지 이어지는 출근 파티에 나 홀로 아침 9시는 조금 외롭기도 했다.


"뭐... 그치? 원래 9시 맞는데, 어차피 다 늦게 오는 거 혼자 맞춰서 와봐야 손해밖에 더 보냐?"


이 말이 이상하게 이해가 될 듯, 되지 않았다. 뇌가 말랑해지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러니까 너도 늦게 와. 뭐 하러 일찍 오냐? 그런다고 돈 더 안 준다."


하지만 이상한 고집이 있던 나는 다음 날도, 그 다다음 날도 어김없이 오전 9시 출근을 고수했다. 애초에 근로 계약을 오전 9시 출근으로 정했는데, 남들이 당연히 지키지 않는다고 나 또한 물 흐르듯 따라가는 게 사실 영 내키지 않았다는 게 이유였다.






어느 날, 밤 11시. 작은 방에서 재고 체크를 하고 있을 때였다.


"내일부터 일주일 간 지각 안 하고 오는 사람, 내가 인센티브 줄게."


몇 시간째 이 방에 갇혀있었던가. 피로함에 녹아내리는 정신을 깨운 건 다름 아닌 대표의 목소리였다.


"야, 넌 좋겠다. 하던 대로만 하면 되겠네."


오랜만에 알람이나 맞춰야겠다며, 흥얼거리던 팀장이 나를 툭 친다. 진짜 알람을 맞추고 있는 팀장을 가만 바라보다 시선을 거뒀다. 이상하게 단전에서부터 부글부글 화가 끓어오른다. 하고 싶은 말은 너무도 많은데, 차마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영 종잡기가 힘들었다.


마치 매말랐던 '마음'이라는 땅에 작은 불씨가 내려앉은 듯했다. 그냥 이대로 적응하고, 체념해 사는 것이 정답이라고만 생각해 외면했던 무수히 작은 것들. 그 사이에 꽁꽁 자취를 감추고 있던 불씨가 별안간 명치를 타고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옛말에 '가는 날이 장날'이라는 말이 있다. 계획하지 않은 날에 중요한 일이 생기거나 예기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 주로 쓰는 그 옛말.


그 옛말은 지금의 내가 처한 상황이기도 했다. 나는 지각을 계획하지 않았으나, 예기치 못한 지각을 하게 되었다. 이곳에 출근한 이래로 처음 겪는 일이었다.


사유는 '지하철의 연착'이었다. 하나도 억울하지 않다면 사실 그건 완전한 거짓말이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로 출근 시간대 열차들이 모조리 멈추고, 그대로 밀린 것인데 하필이면 그게 '오늘'이라니.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한달음에 뛰었다. 환승 구간을 지나, 다시 열차를 갈아타는 순간까지 누가 봐도 '지각을 앞둔 안타까운 직장인'의 모습으로 쏘다녔다.


그리고 나는 결국 현관문 앞, 신발장에서 '1분'의 시간차로 지각을 하게 되었다.


나와 함께 현관문 앞에 서서 가쁜 숨을 몰아 쉬고 있던 팀장은 마룻바닥에 발이 닿았다는 이유로 간신히 지각을 면했는데, 팀장의 바로 뒤에 있던 나는 마룻바닥을 밟지 않아 불명예를 안게 된 것이다.


"오늘까지 시말서 써내."


처음엔 사실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시말서요?"


벙쪄서 되물으니, 점심 이후 오후 업무 시간 내 시말서를 작성해 내놓으라는 아주 분명하고도 확고한 대답이 돌아온다. 그 길로 대표는 나를 지나, 나갔다.


사무실은 쥐 죽은 듯 조용했고, 직원들은 서로 눈짓만 주고받았다. 인내심이 바닥나는 소리, 부글부글 화가 들끓는 소리가 내 귀를 울렸다. 이 모든 흥분의 소리가 밖으로도 들리는 건지, 의심될 정도였다.


그때, 난감한 표정의 팀장과 시선이 마주쳤다. 어깨나 한번 으쓱이고 마는 태도를 보니, 아무래도 분노의 한계점에 이른 듯했다.






"팀장님, 다들 단 한 번도 출근 시간 맞춰서 출근한 적 없죠. 그건 팀장님이 더 잘 아시잖아요. 저 혼자 매번 꼬박꼬박 출근해서 업무 준비 다 했어요. 제가 오늘 지각한 이유는 계속 말씀드렸지만 전철 연착 때문이에요. 연착 증명서도 증빙해 드릴 수 있어요."


"..."


"... 정말, 솔직히 말씀드리면 지금 너무, 너무 억울해요. 대표님 회사니까 대표님 마음대로 하는 거 맞는데요. 부리는 직원들한테 먼저 줄 돈부터 제때 주셔야 할 말도 있죠. 지금 저, 매일 야근하고 있는데 그 돈 받을 생각은 이제 하지도 않고요, 주셔야 할 기본급도 제대로 안 주면서 갑자기 일주일 지각 안 하면 인센티브 준다?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을 어떻게 해요. 팀장님이랑 제가 동시에 들어왔는데, 제가 마룻바닥을 안 밟고 신발장 앞에 있었다는 이유로 시말서까지 작성해야 하는 이 상황이.. 진짜 어이가 없고, 이유도 납득이 안 가요."


"아니... 뭐, 네 입장도 이해는 가는데..."


"팀장님, 저 빼고 여기 전부 다 밥 먹듯이 지각하는 동안 아무 말 않으셨죠. 팀장님도 제 시간에 온 적 없으니까 할 말이야 없으시겠지만, 저 혼자 여기 꼬박꼬박 시간 지켜가면서 나왔어요. 그렇다고 제가 이거 알아달라고 한 적도 없죠. 근데, 그래도 이건 아니죠. 저도 사람이라, 당연히 억울하고, 당연히 화나요. 저한테 이런 식으로 하시면 안 되는 거잖아요, 팀장님."


팀장은 푹 한숨을 내쉬었다. 말 좀 조심히 가려하란다.


질린다는 표정, 깊은 한숨... 모든 태도 하나하나가 익숙했다. 월급 이야기를 할 때마다 늘 보던 반응들이었다.


"대표님이 다른 것도 아니고... 어제 말씀하신 거잖아. 무려 어제! 근데 그걸 오늘, 다음 날 바로 이런 식으로 안 지키면 대표님 입장에서는 당연히 화가 나지 않겠냐? 입장바꿔서 생각해 봐. 너 이거 대표님 무시한 거나 마찬가지야. 그것도 알아야지."


"사람을 이런 식으로 모함하시면 안 되죠. 제가 대표님을 무시해서 오늘 의도적으로 지각한 거라고요? 제가? 진짜, 제가요 팀장님? 정말 그렇게 생각해서 말씀하시는 거예요? 지하철 연착을 제가 시켰어요? 그리고 지각 안 하면 인센티브 준다는 건 무슨... 회사 출퇴근이 장난이에요? 무시는 제가 지금 당하고 있는 게 무시죠. 여태 제대로 다닌 저만 호구 만드는 거잖아요. 직원을 생각하는 마음에 순서가 있다면, 적어도 생각머리라는 게 있다면 저 같은 직원부터 독려하셔야 맞는 거예요. 그게 기본적인 대우라는 거고요. 무시는 지금 누가 당하고 있는데!"


결국 언성이 높아지고, 나는 그대로 폭발하고 말았다.


방안이 울릴 정도로 질렀다. 그 순간, 이 지점에선 도저히 화가 나고 억울해 기절할 것만 같았다. 팀장은 그저 같은 말만 앵무새처럼 되풀이했다. 그의 완곡한 주장에 따르면, 아무튼 나는 대표를 무시했고, 무시를 당한 대표가 기분 나빠 시말서를 쓰라고 했으니, 어떻게든 어거지라도 쓰라는 것이었다.


"그래, 너 잘했고 열심히 한 거 알겠다고! 아는데 오늘은 어쨌든 지각했잖아! 아, 좀 그냥 시말서 하나 대충 쓰면 될 거 가지고 왜, 씨 유난이야!"


"제가 잘못한 게 있어야 쓰죠. 잘못한 게 없는데 제가 왜 시말서를 쓰는데요. 그렇게 시말서를 써야겠으면 팀장님이 쓰든가, 왜 내가 써야 하는데!"


이성의 끈이 삐- 소리와 함께 완전히 끊겼다.


결국 팀장은 시말서 내용을 불러줄 테니, 그대로 옮겨만 적으라며 부탁했다. 아니, 실은 강압적인 명령이나 다름 없었다. 애초에 을인 회사 직원이 대표를 상대로 시말서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라는 건 존재할 수 없었다.


'……지각을 함으로써 함께 일하는 직원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회사 분위기를 혼란스럽게 만든 점에 깊이 죄송합니다.'


어떤 문장에도 나는 동의할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눈앞의 시말서를 찢고, 회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다. 그만큼 나는 분노하고 있었다.


대표는 오후 느지막이 사무실로 복귀했다.


"시말서 썼어? 가져와서 여기 붙여 놔."


"..."


"벽 중앙에 잘 보이게 붙여 놓고, 볼 때마다 새겨."


카운트다운이 지난 불길은 결국 머리꼭지까지 올라 폭발하고 만다.


"저 퇴사하겠습니다."


심장에 뜨거운 덩어리가 얹어진 느낌. 이것은 수치일까, 단지 분노일까, 슬픔일까, 억울함일까.


"너 이 업계로 다시 발 들일 생각은 하지 마라?"


대표는 기다렸다는 듯 협박했다. 쿵쿵 날뛰는 흥분의 심장 소리가 귓가에 둥둥 울렸다.


"네. 생각도 없어요."


이 일 아니면 내가 죽어도 할 게 없을까? 그렇지 않다. 나는 쉽게 망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무섭다. 다시 무언가를 배워야 할까?






단단히 잘못 꿴 첫 단추였다. 하지만 잘못 꿴 것을 알고, 되돌리려 했을 땐 이미 너무도 늦었다.


첫 단추는 이미 닳고 닳아 소실돼, 시작점마저 잃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사람은 경험을 해야만 교훈을 얻고, 깨닫는 바가 있다. 하지만, 굳이 겪지 않아도 될 경험이라는 것도 있기 마련이다. 나에게 첫 회사는 그런 아쉬움을 남겼다.


숱한 출퇴근 길마다 차도에 모든 것을 내던지고 싶었던 충동에도 가까스로 버텼던 시간들, 그것은 '나'를 위한 선택이었지만, 이는 결국 내 몸을 물리적으로 망치는 결과를 낳았다.


퇴사를 지르고 집으로 돌아가던 그 길, 아직도 서럽던 그 순간이 꿈속에 종종 떠오른다.


첫 취업, 첫 회사, 첫 사회생활, 첫 지각... 그리고 첫 시말서.

폭풍 같았던 그 시간에서 내가 얻은 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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