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어가는 밤.
카페도 밥집도 문을 닫아 저녁도 먹지 못한 채 호텔로 향했다. 제때 밥도 못 챙겨 먹는 여행이라니, 우리의 여행사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싶다. 여행 메이트는 호텔 진입로에서 당당하게 역주행을 하는 패기를 보였다. 우리보다 더 당황한 벨보이가 급하게 유턴을 지시했고 우여곡절 끝에 차에서 짐을 끌어내리는 데까지 성공했다. 하루가 이렇게 끝나간다. 고되다 우리의 여유 찾기란..
체크인을 하는 도중에 로비가 반짝거리고 웅성웅성한 소리가 계속 들려, 혹시 뭔가가 있냐고 물었더니 특별한 쇼가 준비되어 있다고 한다. 하루에 두 번인데 아직 마지막 스케줄은 시작하지 않았으니 룸에 있다가 천천히 내려오시라고 시간을 두 번 세 번 다시 확인시켜준다. 굶은 저녁을 대신할 컵라면도 사야 하고 여행 메이트의 부은 발에 올릴 얼음도 받아야 해서 겸사겸사 로비로 내려와 푹신한 소파에 대자로 드러누으니 이런 광경이 펼쳐진다. 아고 좋다, 라는 말이 쉴세 없이 입에서 튀어나온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서울 하늘 아래 복닥복닥 일과 싸우던 내가 지금은 반짝거리는 쇼와 음악을 들으며 온 몸이 꺼질 것 같은 푹신한 소파에 등을 뉘고 있다.
이게 무슨 호사인가 싶다가도 굶은 저녁을 대신할 컵라면을 손에 들자니 또 헛웃음이 새어 나온다. 밥도 못 챙겨 먹고 호텔 편의점을 털고 있다니.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장면이 전환하고 있는 영화 같다. 맛있다고 한입 먹어보려는데 끓인 물이 부족해서 라면이 반쯤 과자다. 어떻게든 살려보려 노력했는데 한 줄은 너무 불어 터졌고 한 줄은 덜 익은 오묘한 조화의 맛이 입안에 가득 찼다. 그래도 맥주 한 모금에 피곤이 가신다.
숙소를 뒤질 때는 욕조가 있는지 없는지를 잘 살피는 편이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물에 몸을 담그는 것은 쌓인 피곤을 덜어내는 일에 꽤나 효과적이기 때문. 한참 전에 선물 받은 입욕제는 오늘을 위해 챙겨 왔다. 반짝반짝 빛나는 보랏빛 물에 몸을 담그고 마미공방의 캔들을 켜고 책을 손에 쥐었다. 누가 뭐래도 포기할 수 없는 찰나의 행복이다. 오늘은 보랏빛으로 깔맞춤까지 완벽하다. 완벽한 순간.
"너 자는 거 아니지?" 하는 여행 메이트의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다. 한참 책에 빠져있는 순간이었다. 너무 길게 들어갔었나 싶은 마음에 씻고 나오니 욕조 안에서 죽은 줄 알았다는 우스갯소리를 들려준다. 너무 좋아서 이대로 죽어도 좋을 것 같더라. 어질어질한 기분이 싸하게 올라오는 걸 보니 너무 과했다 싶은 생각도 든다. 그러면 어떤가, 어질어질한 기분은 푹신한 호텔 침구가 부드럽게 감싸 안아 줄 텐데.
일어나, 밥 먹자. 배고파 죽겠네.
눈곱만 대충 떼고는 식당으로 달려가는 아침이다. 간밤의 부실한 저녁도 저녁이지만 왜 여행만 오면 이렇게 아침에 배가 고파 쓰러질 것 같은지는 아직도 풀지 못한 방정식이다. 배가 터질 때까지 먹을 테야.
밤엔 깜깜한 어둠 속에 잠겨있던 풍경은 이제 하늘도 바다도 나무도 보여준다. 무섭게 흔들리는 나뭇가지는 모른 체 하고 싶다. 2월에도 따뜻해서 얇은 옷에 카디건이면 된다던 오키나와 거주 친구의 말은 왜 이럴 때만 이렇게 안 맞나. 늘 반짝거린다는 하늘은 왜 구름이 자꾸 가리려고 드나. 무시하고 싶다. 격하게 모든 외부 환경은 무시하고 지금은 맛있는 밥만 먹고 싶다.
실내 수영장은 이제 리모델링이 끝났고, 외부 공사가 한창이다. 아마 올 해의 성수기를 준비하고 계신 거겠지. 물에는 못 들어갈 것 같다고 예상했지만 혹시나 하고 챙겨 온 수영복은 실내 수영장을 위한 것이었다.
지난번 방콕의 인피니티 풀을 방문하고 결심한 수영을 배워서 수영을 하자를 이제 실천할 때가 왔다. 결심한 지 무려 일 년 하고도 3개월이 지났는데 나는 이제 수영 걸음마를 하고 있는 초보중의 초보. 물론, 인피니티 풀에서 잔잔한 수면을 보면서 책을 읽던 조용한 순간도 좋았지만 즐기라고 있는 물을 즐기지 못한다는 것이 너무 아쉬웠다. 못하니까 할 수 없는 상황이 나이가 들 수록 싫어진다고 할까.
물론 발만 살짝 담그고는 물이 너무 차가워서 따뜻한 마사지풀로 몸을 숨겼다. 가이드 청년이 많이 차갑나요? 하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생각보다 차갑네요 하고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니 수영이고 뭐고 이대로도 괜찮잖아 싶어 진다. 간사하고 얄팍한 마음은 세계 최고다 정말.
그래도 성공했다. 이것 봐 나 이제 수영 배운다.
찰나의 순간에 뭐라도 생각을 할 수 있으면 좋은 시간. 짧은 다짐을 하고 다음번을 기약할 수 있으면 좋은 시간. 지난번 여행에서 멍하니 수영을 배우면 좋겠다고 다짐해서 이번엔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여행. 그래서 좋은 것인가 보다 떠난다는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