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만의 아침 산책

by youyou

동이 틀 무렵이었다. 서울에서의 나는 일찍 눈을 떠야 9시 즈음이고 11시까지 퍼질러 자는 날이 허다했다. 여행은 사람을 바꾼다고 했던가, 동이 틀 무렵에 눈이 번쩍 떠졌다. 졸리다고 눈을 비빌 틈도 없이 지금 산책이다 싶은 생각이 번뜩 들었다. 왠지 지금 천천히 동네 한 바퀴를 해야 할 것 만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아직 깨지 않은 여행 메이트를 그대로 둔 채, 잠옷바람 위에 외투만 걸치고 신발을 챙겨 신고 천천히 밖으로 나갔다. 오늘도 날씨는 그렇게 좋지 않은 것 같았다. 바람이 칼처럼 뺨을 갈랐다. 언제 그렇게 푹 잤냐 싶게 바로 정신이 들었다. 바람의 탓이었다.

사탕수수가 심어져 있는 밭들이 눈 앞에 펼쳐졌다. 구름과 바람과 사탕수수.


그렇게 한참을 걸었다. 이런 시간에 불이 환한 창고인지 공장인지 술도가인지 싶은 곳으로 사람들이 출근하는 모습이 보였다. 밝게 인사를 나누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활기찼다. 벌써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다들 느리고 천천히 하루를 시작하는 작은 섬이라고 생각했는데 모두들 그런 것은 아닌가 보다 싶었다. 하긴 나도 빠르기라면 세계 최고인 서울에서 느리고 늦게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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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처럼 부지런히 산책을 나온 사람들인 줄 알았더니 자세히 보니 스쿠버다이빙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렇게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는 날에도 물속을 향해 돌진하는 사람들은 바다를 얼마나 사랑하는 걸까. 따뜻하고 좋은 날에 하는 스쿠버다이빙이 그렇게나 좋다고 하는데, 이번에 기회를 놓쳤으니 다시 방문할 핑곗거리가 생겼다. 최근의 여행들에는 뭔가 아쉽거나 놓친 것들을 하나씩 두고 오는 일이 많은데 이런 것들이 다음 방문의 핑곗거리가 될 거라고 생각하니 그것 또한 너무 즐거운 일이다.


느릿느릿 걷고 있는 중에 큰 개와 산책하는 할아버지를 만났다. 순해 보이는 얼굴의 개는 내 근처에 와서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더니 다시 평온한 얼굴로 할아버지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늘 다니는 길일 텐데 호기심이 넘치는 개는 종종 멈춰 서서 탐색에 여념이 없었고 초행의 나는 자꾸 서서 바람을 맞거나 나무를 구경하거나 남의 집을 구경했다. 우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긴 시간 함께 걸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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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길을 걸어가면 바다가 나오겠지 하는 길들이 몇 개 있었는데 왠지 지나치고 싶은 느낌이더니 바로 이 길이다 싶은 길이 나타났다. 평소엔 운명이니 직감이니 하는 말들을 비웃으며 넘기곤 하는데 여행에선 어떤 길이 운명 같고 어떤 물건이 내 것 같고 이 순간인 것 같은 직감들이 넘쳐난다. 너무 넘쳐나서 붙잡을 틈도 안주는 일도 있다. 오늘은 이 길이 내 길인 것 같아서 천천히 바다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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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하고 탄성이 나왔다. 작은 프라이빗한 바다가 나를 반겼다. 양쪽으로 닫힌 작은 바다는 아무도 없었고 조용했고 파도조차 숨을 죽이는 것 같았다. 아직도 꿈속을 걷는 것 같은 느낌이다가 쪼그려 앉아 잔잔한 파도소리를 한참이나 듣고서는 실감이 났다.

카메라 파노라마 기능으로도 다 담을 수 없는 풍경이 예뻐서 이럴 때 360도 입체 어플을 깔지 않은 것을 개탄하다가 조용히 주머니에 핸드폰을 넣었다. 최선을 다 해 카메라에 풍경을 담더라도 지금 이 느낌을 설명하긴 어려울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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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에서 끝까지 몇 번이나 걸었다. 찬 바람을 한참이나 맞았더니 얇은 잠옷 바지 안에 있는 맨살이 시렸다. 얇은 운동화 속 맨발도 얼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괜히 떠날 수 없어 종종걸음을 몇 번이나 하고 춥다는 말을 수십 번을 내뱉고 나서야 다시 숙소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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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는 길에 정신을 차려보니 이런 팻말이 있어 이 바다의 이름은 51번인가 하고 중얼거렸다. 나중에 숙소 주인분에게 바다 사진을 보여주며 아침에 이런 곳에 다녀왔는데 여기가 어딘지 궁금하다고 물었다. 여기는 자넷 비치라고 하는 곳이에요. 어땠나요? 좋았나요?라고 말하시길래 아무도 없었고 나 혼자였는데 너무너무 좋아서 자꾸 생각이 날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덧붙인 이야기를 해 주셨다.

'내 남편은 이 동네 사람이에요. 그리고 남편의 아버지는 물고기를 잡는 사람이에요. 아버지가 늘 이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곤 했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이 바다를 오지상(아저씨) 비치라고 부르기도 해요. 남편도, 남편의 아버지도 너무 좋아하는 바다예요. 마음에 들었다니 너무 기뻐요.'


저도 너무 마음에 들었어요. 그들의 바다에서 아침을 보낼 수 있어 너무 기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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