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하자면, 나는 물을 마실 줄 모른다.
더 정확하게는 생수를 마실 줄 모른다. 물 맛을 모른다고 표현해야 할까.
엄마는 늘 옥수수나 보리, 결명자와 같은 곡물을 넣어 물을 끓여줬고, 그런 것들이 물이라고 굳게 믿고 자라온 나는 아무 맛도 나지 않는, 마치 비리기까지 한 것 같은 생수는 물인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엄마품을 떠난 대학교 입학 무렵부터 나는 물을 입에 대지 않았다.
더 이상 물을 끓여줄 엄마가 곁에 없다는 것은 곧 물이 없다는 의미였다.
생수 대신에 물을 대체할 온갖 음료를 입에 가까이했는데, 그중에 최고는 다년간 커피였다. 물처럼 연한 커피를 물처럼 마셨다.
그리고 최근에 커피를 제치고 내 물이 되어주는 것은 홍차, 그중에서도 일본 브랜드 루피시아다. 공방 선반을 가득 매운 루피시아 차를 돌려가며 물처럼 마시는 것을 즐긴다.
도쿄를 여행할 때 빼놓지 않고 꼭 들리는 장소도 역시 루피시아다. 특히나 루피시아 지유가오카 매장을 정말 사랑한다. 정말이다. 지인의 일본 여행에 루피시아를 추천하거나 구매를 부탁할 때는 전화기만 붙잡고도 지유가오카 역에서 루피시아를 찾아가는 길을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이번 여행엔 차를 좋아하기론 나보다 더 유난스럽고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는 친구가 동행한지라, 그냥 뭐 입장하자마자 둘 다 정신을 놓았다. 부탁받았던 목록도 있고, 다 마셔서 채워야 하는 차들도 있고, 시즌 한정의 차도 구경해야 하고 정신이 없을 수밖에!
지유가오카에선 때마침 차 수업이 열리고 있었는데 조금 일찍 알아서 예약했더라면 더 좋았겠다 하는 아쉬움도 있는데 한 번만 들으면 아쉽고 계속 듣고 싶겠지.
지유가오카점엔 시음용 테이블이 크게 준비되어 있고, 원하는 차를 몇 가지 말하면 바로 시음할 수 있게 도와준다. 고민하는 차와, 마셔보고 싶은 차들을 몇 개 부탁드려 시음하고 있노라니 여기서 머물고만 싶었다. 그렇게 앉아서 이 차 저 차 마시고 추천하는 다른 차들도 마시고, 그렇게 마시고 또 마시고요.
늘 나에게 루피시아 말만 듣다가, 처음으로 루피시아를 방문한 친구는 깊은 고민이다. 녹차보단 홍차, 특히 가향차를 가볍게 물처럼 마시는 나는 루피시아 녹차 라인은 가지고 있는 것이 없어서 딱히 추천할 것이 없었는데 다양한 산지의 녹차 라인업에 친구는 신난 눈치.
다른 브랜드들이 그러하듯이 루피시아도 무게와 틴케이스 유무에 따라 가격차이가 많이 난다. 시즌 한정의 예쁜 라벨이 아니라면 틴 케이스는 굳이 사지 않아도 되고, 봉지로 구매하면 훨씬 싸게 많이(!) 살 수 있다.
두 사람의 적극적인 구매는 면세한도까지 도달했고, 루피시아 멤버십 카드를 탐내는 내게 직원은 이미 멤버십 할인 한도보다 면세로 훨씬 더 많은 할인을 받았으니 그게 더 유리하다고 타일렀다. 근데요, 할인 말고 그냥 카드가 탐나는 내 맘을 모르시나요.
조금 빠르게 휙휙 지나가는 시음 준비의 모습.
아련한 봄의 추억을 지나, 우리는 가을의 교토 루피시아 방문을 약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