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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자이모 May 13. 2016

꼭 여행을 즐길 필요는 없다

생활글쓰기#03

이국적이며 낮선 환경으로 멀리 떠나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이 여행의 조건이라면. 공휴일에 몸살이 난 아빠와 응급실을 가는 일. 이것도 여행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날씨는 화창했고, 어딘가 내가 가보지 못한 곳으로 떠나는 것은 여행의 조건에 맞았다. 오는 길에 타이어 가게에 들러서 '타이어 휠 얼라이먼트' 라는 새로운 경험도 할 수 있었고. 하지만 이것을 여행이라고 하는 사람은 없을거다.

여행의 목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내 내면에 부족한 갈망을 조금은 파악할 수 있다. 긴 여행을 결정한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짧은 여행도 마찬가지다. 직장을 그만두고 떠나버린다든지..굳이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짧은 여행을 다짐하게 된 이유를 들여다보면 내가 어떤 이유에서 그런 탈출을 꾀하게 되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이 이해하는 과정은 여행을 떠나기 전이나 다녀온 뒤로 이루어질 수 있다. 아니면 여행을 하는 도중 처음 생각과 끝내 결론에 이르게 된 생각이 발전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런 과정이 내 마음을 쓰다듬어 주는 위로와 같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해결책이 되지는 않지만. 언뜻 생각했을 때 여행의 이유와 진짜 이유는 다를 수도 있다.

나의 경우 갑자기 여행을 가게 된 이유는 여행을 갈만한 휴가가 생겨서라는 것이 명분이겠지만. 심호흡을 크게 해도 사라지지 않은 가슴 답답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주말이면 가족을 방문해야 하고. 가지 않으면 죄책감을 느껴야 하고. 답답한 휴대폰 속 연락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것들을 무시할 때마다 내가 이기적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고. 내가 속한 갇힌 사회의 시선에서 저울질 된 내 모습에 나도 모르게 동조하게 되는. 심리적인 압박감에서 멀리 벗어나고 싶었다. 어쩌면 영영 떠날 준비를 미리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여행의 목적지는 '진짜 내가 있고 싶어 하는 곳'일 확률이 높다. 익숙한 언어가 주는 지긋지긋함. 누군가와의 정해진 약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 정해진 관계와 무언의 압박에서 탈출하는 경험은 거리에 비례하는 듯 하다. 하지만 여행이기에 좋은 것, 그리고 아쉬운 것은 그것이 '정착'으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언제고 다시 내 둥지로 돌아올 수도 있다는 편안함이 이방인으로서의 지위를 부여한다. 내 영혼이 있고 싶어하는 곳이 실제 가보면 기대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도, 여행 준비를 통한 사전정보 때문일 수 있지만, 이미 내가 기대하는 것으로 감싸진 안경을 쓰고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정착으로 이어지지 않는 여행은 언제나 옳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현실과 환상은 다를 수 있다. 대부분은 현란한 사진과 다채롭고 이국적인 경험들이 힘들고 어쩌면 대수롭지 않은 경험들까지도 반짝거리는 것으로 포장한다. 지난 내 한 달 동안 여행의 목적은 그저 현실에서 멀리 벗어나고 싶은 게 대부분이었고, 그랬기에 특별한 것을 기대하지는 않았었다. 다녀온 뒤 진한 향수가 남지는 않았지만. 덤덤한 마음과는 달리 몸이 회복이 더디다. 한 달이 지난 지금에서야 여독이 빠진 기분. 무언가 희생하고 치르는 댓가라고 느낀다. 피부가 부석부석거리고 나지 않던 여드름이 솟는 현상이 3주 정도 지속된 것 같다. 몸 구석구석 독소가 쌓인 기분 탓에 땀 빼고 하루에 물을 2리터 정도씩 들이켰다. 아직 분명히 정의하기는 이르지만 나는 새로운 경험을 위한 리프레쉬를 위한 여행에는 적합한 타입이 아닌 것 같다. 정착을 위해서라든지 다른 목적성이 있는 단순한 '떠남'이 더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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