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집안 어른들이 걱정하는 투로 이야기한다. 자식을 너무 귀하게 키우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런 말을 들으면 나는 표정 관리하는 것이 어렵다고 느낀다. 최선은 짐짓 깨달은 표정으로 눈을 감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태도를 고치려고 노력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실제로 두 딸을 귀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노는 것을 바라보면, 다른 부모들도 나와 비슷한 마음으로 아이를 키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들 각자에 대한 작은 프라이드가 하나씩 있다. 미끄럼틀에 기대어 아이들이 주고받는 소박한 무용담을 들으면 그런 느낌을 받는다. 주말에 어딘가에 다녀왔다든지, 새로 본 콘텐츠, 자기만 가지고 있는 장난감에 대해 자랑을 한다. 그런 이야기를 듣노라면 각자의 작은 궁전이 있고, 그곳에서 애지중지 보살핌을 받는 요즘 아이들의 모습이 보인다.
갈등 상황이 생겨도 우리 어릴 적과 다른 분위기가 보인다. 뭐랄까, 나도 귀하지만, 너도 제법 귀하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해야 할까. 적어도 우리 세대의 어린 시절처럼, 치고받는 싸움하는 경우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말싸움만 하고 골목대장도 없다. 한 명이 억울한 상황이 생기면, 분에 못 이겨서 눈물을 뚝뚝 흘리거나, 웅크리고 있다가 엄마에게 전화를 걸면서 투덜투덜 집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상황이 마무리되곤 한다.
서우와 온이가 그런 상황에 부닥치는 일은 별로 없었지만, 딱 한 번 이런 일이 있었다. 어떤 아이가 서우에게 반복된 장난을 하고, 딸이 하지 말라고 어필해도 상황이 제자리걸음이었다. 그때, 조용히 개입했던 기억이 있다. 놀이터 친구들의 이름을 대부분 아니까. 누구야, 너도 소중하고 아저씨의 딸도 소중한데 그렇게 해서 되겠냐고 말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쉽게 받아들여서 약간은 놀랬었다. 머리를 긁적이면서 쿨하게 잘못을 시인하는 모습을 보면서, 요즘은 아이들은 우리 세대와 제법 다르다고 느꼈다. 기본적으로 자존감이 높고 젠틀하다고 해야 할까. 거기에 상호존중의 태도가 제법 몸에 익은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 지점이 꽤 희망적인 징조처럼 느껴졌다.
우리 세대는 시야가 무척 좁아져 버린 세대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자유롭게 꿈을 꿀 수 있는 권리는 있었지만, 실제로 이룬 것은 별로 없는 세대라서 그런 것이라 짐작하고 있다. 만약에 내가 이루고자 했던 꿈을 몇 번의 좌절을 통해서 이루었다면, 지금 이런 생각을 하지도 못했으리라.
결혼이 선택사항이 되고, 좀처럼 아이를 갖지 않는 것도 그것의 연장선이지 싶다. 설사 자신의 꿈을 이루었다고 하여도, 자식이 꿈을 이루는 과정이 그려지기 때문에 낳기 전부터 그 존재가 애처롭게 느껴지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첫째를 낳으면 얼마를 주고, 둘째를 낳으면 얼마를 준다 한들, 그게 무슨 큰 의미가 있을까. 오히려 현존하는 아이들의 따뜻한 마음을 지켜주는 것, 그들이 자라는 환경이 우리의 환경과 같아지지 않도록 애쓰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서우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로 그런 고민을 더 하게 된다. 아이가 자랄수록 현실과 만나기 때문에, 그들이 마주하게 될 좌절에 대한 걱정이 생긴다. 그래서 많은 부모가 어릴 적부터 영어 교육을 하고, 학년이 거듭될수록 학원을 보내는 것이지 싶다. 나도 티격태격 놀기만 하는 두 딸을 보고 있으면 흐뭇하다가도 가끔은 조바심이 든다. 이렇게 놀아주기만 하는 아빠가 옳은지 확신이 들지 않는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수학을 잘하는 아이들보다, 영어를 잘하는 아이들보다, 타인을 소중히 하는 아이들이 많아져야 세상이 괜찮아질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런 아이들이 세상에 무척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과반수가 넘었으면 좋겠다. 서로가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굳게 인식하는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세상은 지금과는 다를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런 나라는 가르치고 배우는 것도, 노동도, 사랑도, 결혼도, 죽음도 다를 것이라 생각한다. 많은 것이 지금과는 사뭇 다를 것이라 생각한다.
집에 와서 밥을 짓거나 설거지를 하기 싫을 때는 주문처럼 외우는 말이 있다. 나도 제법 소중하지만, 아내도 소중해. 나는 대체가 가능한 일을 하고 있지만, 아내는 대체가 불가능해. 그러면, 또 피식 웃음이 나면서 동시에 ‘영차’하며 힘을 내게 된다. 놀이터 가는 것도 비슷하게 귀찮을 때가 있다. 그러면 역시나 탓하는 것은 나의 좁은 시야다. 시선을 넓히면 세상의 다른 부분들이 보이고, 몇 가지 할 수 있는 일들이 보인다.
따뜻한 봄이 오면 전전긍긍하는 것보다 놀이터 구석 벤치에 앉아서 꾸벅꾸벅 조는 아빠가 되고 싶다. 봄볕 아래에서 나는 졸고, 두 딸은 조금씩 자라났으면 한다. 졸다가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리면 잠시 깨는 정도에서 그쳤으면 한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뭐라고 하든 아랑곳없이 자랐으면 좋겠다. 그래야 꿈과 현실이 만나도 그렇게 힘들지 않은 세상이 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