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커피, 밤육아(1)

지새우다

by 정인한



아침 일곱 시쯤, 여자 손님이 카페에 들어왔다. 평소에는 한낮에 오는데 오늘은 특별한 방문이었다. 아무래도 밤을 지새운 모양새였다. 눈동자는 빛나지만 눈 밑이 어두웠다. 그녀는 들어오자마자 바 앞의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조금은 급한 듯 빠르게 커피를 주문했다.


허니 라떼와 도피오였다. 나는 마른 포터 필터를 글라인더에 밀어 넣었고, 낮고 빠른 모터 소리가 났다. 이어서 분쇄 아로마가 은은하게 퍼졌다. 정리되지 않은 원두를 살짝 모아주고, 탬퍼로 꾹 눌렀다. 최대한 간결하고 재빠르게 동작을 취하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소음 없게 그룹 헤드에 장착하고 추출 버튼을 눌렀다. 익숙한 펌프 소리가 머신에서 흘러나왔다.


예령 엄마 세미는 갓 내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미간이 조금 넓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나에게 조곤조곤 이야기했다.


"사장님, 어제 예령이가 몇 시에 깬 줄 아세요?"


단골손님의 아기는 새벽 두 시에 깼고, 그녀는 서늘한 달을 밤새워 지켜본 모양이었다. 나는 특별히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저 약간의 감탄사를 넣으며, 영업 준비에 분주할 뿐이었다. 하룻밤에 쌓인 마음이 많은지 한동안 그녀는 커피를 마시랴, 이야기하랴 바쁜 듯했다. 그렇게 있더니 잠시 뒤 알람이 울렸고, 그녀는 옷을 여미며 밖으로 뛰어나갔다. 아마도, 남편의 출근 시간이지 싶었다.


그러고 보면, 나도 그랬던 시절이 있었다. 지독하게 무심했던 시절이었다. 아내가 온전히 밤을 희생했던 날이 많았다. 같은 방에서 세 식구가 살았지만, 나모르게 아내만 그토록 깊은 희생을 했었다. 만약에 둘째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지새우는 밤에 대한 경험은 영원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온이가 태어나니 나의 역할이 늘었다. 연년생에 가까운 두 딸이 함께 깨는 날이면 일이 아주 어려웠다. 파도가 연이어 치는 것처럼 울음이 울음을 불렀고, 잠은 증발했다. 그것은 곤란했고 일찍 출근한다는 것을 핑계 삼아 의무를 피할 수가 없다. 둘째가 집으로 온 날부터, 제대로 된 아빠의 역할을 배우기 시작했다.


아내가 온이의 수유를 끝내면 나는 서우가 깨지 않게 그녀를 안고 거실로 나왔다. 일단 트림을 시켜야 했다. 따뜻한 물주머니 같은 그녀의 작은 등을 문질렀다.


속으로 기도를 했다. '빨리 트림해야지, 온아.' 소화되었다는 신호를 들으면 다음 순서는 재우는 것이었다. 이것이 더 어려웠다. 손목도 아팠고 아이는 커갈수록 무거워졌다. 아가 통통해질수록, 잠에 빠져서 스르륵 흘러내리려고 할수록 더 힘들어졌다.


처음에는 서서 토닥토닥하다가, 나중에는 소파에 그녀를 가슴에 올리고 뒤로 누워서 타닥타닥했다. 하지만 대부분 내가 먼저 잠들어 버렸다. 그런 생활을 한 일 년 정도 했다.


잠결에 내가 웅얼거리면 작은 생명도 뭐라고 한다. 그녀가 칭얼거리면 내 입은 불수의근이 된다. 뭐라고 하면 나도 중얼거린다. 아마도 "온아, 이제 자야지." 이런 식의 멘트다. 자면서 그게 느껴졌다.


거의 매일 지새우는 것. 거의 매일 단속적인 취침을 하는 것은 아마도 누구에게 힘든 일이지 싶다. 출산의 상흔이 남은 아내에게도 하루하루 돈벌이 걱정인 남편에게도 힘든 일이다. 그림 같은 삶이 이어질 것이라 믿었는데, 오히려 현실에서 오는 또 다른 걱정이 더 해지면, 극심한 우울감이 들기도 한다. 무엇인가 터져 나오고 또 다른 무엇은 쪼그라든다. 이 모든 것이 빨리 지나가 버렸으면 하는 바람이 생긴다.


하지만, 두 사람이 함께 무엇인가 하려고 할 때, 나만 최선을 다한다고 느끼지 않을 때, 그렇게 시간을 보내면서 신뢰를 쌓아갈 때, 새로운 마음이 생기기도 한다. 아니 존재하는지 인지하지도 못했던 새로운 땅 같은 믿음이 생긴다.


내가 아이의 그런 수면 리듬을 탓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오히려 아기가 살아가는 것이 원초적으로 옳다는, 배고플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깨고 싶을 때 일어나는 것이 태초의 모습라이는, 정해진 시간에 움직이는 나의 삶보다 자연스럽다는,


긴 잠을 청해야하고, 또 규칙적으로 밥을 먹는 것. 이런 것은 어떻게 보면 사회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세상의 기준이라는, 어른의 기준이라는, 어른의 시간과 아기의 시간이 다를 뿐이라는,


*

두 딸은 이제 조금 자라서 긴 잠을 잘 잔다. 올해 일곱 살 된 첫째 딸은 밤중에 오줌이 마려우면 앉아서 나를 조심스럽게 흔든다. 서우는 미안한지 먼저 말을 못 꺼내는 착한 소녀가 되었다. 나는 "쉬하고 싶어, 딸?"하고 물어본다.


그런 차분한 대화가 익숙해진 우리를 보면 육아의 시간이 끝나고 있음을 느낀다. 요즘은 점점 더 오지 않을 이런 순간이 고맙다. 메마른 어른의 손을 잡은 촉촉한 어린 손이 꿈같을 때도 있다.


두 딸은 가까운 미래에 어른의 시간 속에 온전히 편입될 터이다. 고된 낮을 견디고 안온한 밤을 기다리는 삶. 그것을 느낄 때 지난날이 후회된다. 동이 트면 더 따뜻한 아빠가 되어야지 다짐도 한다. 온전한 우주에 나보다 더 가까운 아이를 지키고 싶은 욕심도 든다.


요즘은 아기를 많이 낳지 않는다. 미래가 불안하고, 스스로 몸을 가누기에도 힘이 들기 때문이다. 도리어 서로를 사랑하기 때문에, 고생시키지 않기 위해서 피임한다. 결혼을 하려 하면 나의 짐을 나누어야 하는 반려자의 등이, 부모가 되려 하면 자식이 짊어져야 할 짐이 보이기 마련이다. 슬프지만 그런 것 같다.


야밤에 혼자 맥주를 마시면서 이런 상상을 한다. 아기는 다시 자고, 어른은 새벽달을 보는 것. 다른 시간의 파도가 부딪치는 것. 이런 것이 태초가 현재에 보내는 신호가 아닐까, 하는 상상.


나는 육아의 밤을 통해 더 먼 미래를 계획하기도 하고, 자식이 살아갈 세상을 고민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로 더 인간다운 생각을 하는 각성제가 된다. 모든 아빠의 마음이라 믿는다.


밀물과 썰물처럼 밤은 가고 새벽이 온다. 그 시간의 파랑 속에서, 아기가 자란다. 어떤 길었던 밤의 경험은 더 오랜 시간을 살아버린 느낌이다. 그래서 나는 이른 아침에 카페에 오는 사람을 만나면 경외심이 생긴다. 샛별같이 눈이 빛나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떤 시간을 살았고 깊어졌다는 증거다. 그것을 보면서 나는 고된 육아의 반복과 잠의 부족이 꼭 무기력과 우울로 수렴되지는 않음을 짐작한다.


어느덧 저녁밥이 익어갈 시간이다. 나와 비슷한 나이의 남자가 종이잔에 아메리카노를 시킨다. 그가 길 건너편으로 간다. 흐르는 하천을 보며 커피를 마시는 둥근 등이 보인다. 그것이 보기에 좋다. 밤 커피를 마시는 남편이라. 보름달 같다.


-경남도민일보에 연재된 글을 오늘 리라이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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