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잇감을 향한 사냥꾼들의 매서운 질주 (이정재/정우성/전혜진/고윤정)
감독: 이정재
출연: 이정재, 정우성, 전혜진, 허성태, 고윤정
장르: 액션, 스릴러
상영시간: 125분
개봉일: 2022.08.10
1983년, 미국 워싱턴에서 벌어진 대통령 암살 시도 테러 사건. 각각 안기부 해외 파트와 국내 파트 차장 직을 맡고 있는 ‘박평호(이정재)’와 ‘김정도(정우성)’는 조직 내에 북한 첩자 ‘동림’이 존재한다는 정보를 입수한다. 워싱턴에 이어 도쿄에서까지 연일 국가 기밀사항들이 밖으로 새어 나가자 두 사람은 상대 팀을 용의선상에 두고 스파이를 찾기 위한 조사를 펼친다. 두 남자의 날이 선 추적이 감춰진 실체에 가까이 접근한 순간, 사건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면서 두 사람의 관계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어 닥친다.
<헌트>는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을 배경으로, 대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고 북한과 한국이 냉랭한 대립 관계에 놓였던 시기에 활동하던 안기부의 주축 요원 ‘박평호’와 ‘김정도’를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된다. 두 주인공이 서로를 북한의 첩자로 의심하며 상대의 정체를 밝힐 때까지 맹렬한 추적을 감행하는 내내 긴장의 끈을 팽팽하게 유지하고, 후반부까지 누가 동림인지 알 수 없는 전개를 통해 수사망을 좁히는 과정을 짜임새 있는 각본으로 스피드 있게 빌드업한다. 쉽게 답을 알려주지 않고, 두 인물을 이분법적인 선악 관계로 명확하게 그리지 않았기 때문에 관객의 추리 방향은 계속 흔들리게 되며 마침내 결말에 도달했을 때 관객은 강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작품의 장르가 첩보 영화라는 것을 고려하면, 정체성이 뚜렷하고 장르 표현에 굉장히 충실했음을 알 수 있다.
<오징어 게임>으로 세계적인 배우로 우뚝 선 ‘이정재’의 입봉작이기도 한 <헌트>는 배우로서 수많은 액션 블록버스터 영화에 출연한 경험 덕택인지 화려한 총기 액션을 연출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소위 ‘물량공세’라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워싱턴과 도쿄, 태국을 배경으로 큰 스케일의 총격전이 펼쳐지고 대규모 폭발신과 육탄전까지 첩보 액션물에서 보여줄 수 있는 액션신은 전부 보여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영화의 오락성을 위해 폭력적이고 때려 부수는 장면들을 억지로 우겨 넣은 것은 절대 아니다. 해외를 무대로 펼쳐지는 대규모 총격전은 영화가 모티브로 삼고 있는 역사적 배경들과 함께 움직이며 인물들의 심리를 반영해 섬세하게 배치함으로써 앞서 언급한 작품의 서스펜스를 끌어올리는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제작비를 총기 액션에 가감 없이 투자했고, 이를 표현하는데 일말의 어색함이나 과함이 없다. 시각적 재미와 몰입감 상승에 모두 기여했다는 점에서 훌륭한 액션물이다.
<태양은 없다> 이후 23년만에 재회한 두 절친, 일명 ‘청담 부부’로 통하는 ‘이정재’와 ‘정우성’의 연기 케미스트리는 작품에서 가장 빛나는 요소 중 하나다. 두 배우가 연기한 ‘박평호’와 ‘김정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배경지식이 머릿속에 어느 정도 잡혀 있어야 하지만, 이를 잘 알지 못하더라도 두 배우의 명연기가 작중 캐릭터에 대한 부족한 설명을 충분히 메꾼다. 극중 서로를 견제하는 두 배우의 눈빛은 그 서늘함만으로도 긴장감을 형성하며 특히 단순히 적대적으로만 그려지지 않는 두 사람의 복잡한 관계를 표현하는 심리 묘사가 뛰어나다. 어떤 영화에 출연하더라도 압도적인 존재감을 발휘하는 것으로 유명한 두 배우이지만, 영화계에서 손에 꼽히는 절친이 대립 관계로서 서로를 추적하는 첩보 액션 영화에 주인공으로 출연한 것은 유독 특별하다. 왜 이 작품을 두고 ‘이정재’와 ‘정우성’이 <헤어질 결심>을 찍는 것 같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오겠는가. 자신의 비밀이 탄로나는 것을 막고자 상대방을 스파이로 강하게 몰아세우는 정보전은 서로를 향한 집착처럼 보이기도 하며 ‘박평호’와 ‘김정도’의 속내가 모두 밝혀진 후 손을 잡게 되는 두 사람의 관계 변화는 굉장히 묘하게 그려진다. 두 배우가 아니었다면 담백하게 그려졌을 장면들이 마치 하나의 느와르 로맨스 작품처럼 묘사되기도 한다는 게 이 작품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매력이다.
아쉬운 점을 꼽자면 <헌트>의 각본이 한국의 역사적 사건에 크게 의존적이라는 것이다. ‘5.18 민주화운동’처럼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사건만이 등장하는 게 아니라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이웅평 귀순 사건’ 등 다양한 역사적 사건을 모티브로 상상력을 발휘하였고 ‘조총련’, ‘안기부’ 등 이해가 필요한 여러 단체들도 비중 있게 언급된다. 이와 같은 배경들을 시간 순대로 나열하는 것이 아닌 병렬적으로 배치하였고, 많은 인물들이 얽혀 있기 때문에 충분한 배경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해에 어려움이 없겠으나 역사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관객에게는 영화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첩보 스릴러라는 장르에 집중해 시종일관 빠른 전개를 취하며 군더더기에 대한 설명은 배제하였고, 이로 인해 배경적인 부분에 대한 디테일은 어느 정도 포기한 셈이다.
그럼에도 <헌트>는 한국 영화의 고질적인 문제점들을 타파하고자 신경을 기울였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특정 이념을 강조하거나 관객을 계몽하기 위한 메시지를 설파하지 않고, 1980년대 당시 북한의 세습 독재 정권과 국민을 핍박하던 한국 군사 정부에 대한 비판을 인물들의 행동에 대한 명분으로서 활용하는데 그친다. 여배우를 활용하는 방식 또한 비슷한 장르의 국내 영화들이 추구했던 수동적인 태도와 다르다. 그 중심에는 ‘박평호(이정재)’의 심복으로 활약한 ‘방주경’역의 ‘전혜진’이 있는데, ‘이정재-정우성’과 함께 총격신을 소화하는 것은 물론 남자들의 뺨을 날리고 대치 장면에서 절대 물러서지 않는다. 특히 주인공 옆에 딱 붙어서 ‘구멍 한 번 파볼까요?’라는 호기로운 대사를 날리고, 쾌활한 태도로 행동대장을 자처하는 캐릭터는 언제나 남성이었는데, 그 역할을 ‘전혜진’이 소화함으로써 평범한 캐릭터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이정재와 부녀 같은 케미스트리를 완성한 신예 ‘고윤정’도 베테랑 배우들 사이에서 전혀 기죽지 않았으며 잠깐의 등장만으로도 강렬한 카리스마를 선보인 ‘정경순’도 인상 깊었다. 감독인 ‘이정재’가 첩보 액션 영화를 기획하면서 그동안 비판 받았던 같은 장르의 한국 영화들과 다른 길을 걷기 위해 애쓴 흔적이 돋보였다. 해당 장르의 영화를 선호하지 않는 내가 <헌트>만큼은 재밌고 만족스럽게 감상한 이유는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