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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을 쫓는 사람들 - EP.0

냉쫓사 입문서: 그들은 왜 평양냉면에 환장하는가

by popofilm

태생적으로 나는 사람들과의 모임이라는 게 버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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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만나야 하는 인간이 네 명을 초과하는 순간, 사방에서 울려퍼지는 제각각의 목소리에 생명 에너지가 빨려 순식간에 녹초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테이블 모서리를 핑퐁치듯 부딪히며 오가는 발화들은 내게 가까이 닿지 못한 채 공중에서 휘발되어 버리고, 결국 난 그 모임에서 아무것도 얻지도, 느끼지도 못한 상태로 집에 돌아오곤 한다. 기껏 시간을 보내고 왔는데, 매번 아무런 기억이 남아 있지 않은 나의 공허한 머릿속을 들여다 보고 있을 때면 이런 식의 사회생활은 내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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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대학교에 입학한 지 일 년 만에 프로불참러가 되기 시작했다. 나를 부르던 소수의 모임에서도 점차 나를 찾지 않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수로 모여야 하는 약속들은 내게서 완전히 사라졌고, 나는 잠시나마 원치 않은 대화에 껴 기를 빨리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을 느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모임을 극도로 싫어하는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말하는 것을 좋아한다. 종종 스스로 '다말증' 환자가 아닐까라는 의심을 했을 정도로 말이 정말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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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해방일지>를 보면서 '이민기'가 연기한 '염창희' 캐릭터에게 괜히 동질감을 느꼈던 게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임이라는 건 내게 불필요하면서도, 꼭 필요한 것이다. 두 단락만에 급격하게 태세전환을 하는 것 같아 당황스럽겠지만, 어쩔 수 없다. 난 타고나길 모순덩어리인 인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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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한 가지 정정이 필요할 것 같다. 내가 극도로 모임을 비롯한 친목 활동을 싫어한다고는 했지만, 여기에는 전제가 깔려 있다. 바로 내가 주최자가 아니면서, 동시에 불편한 사람들이 포함된 5인 이상의 모임에 참석하는 것만을 기피하는 것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내가 주최자이면서 나랑 허물 없이 지내는 가까운 사람들이 참석하는 모임은 좋아한다. 이때 나의 자아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해도 될 정도이다.

GQB4nnVbEAE4jbJ.jpg 내 친구라고? 너 누군데

하지만 애석하게도, 나이가 이십 대 중반 즈음을 넘어가면 주변 친구들을 명분 없이 주기적으로 모으기가 쉽지 않아진다. 정말 가까웠던 사이일지라도 잠시 연락에 소홀해지는 순간, 일 년 넘게 소식이 끊기기도 하고, 2-3년간 얼굴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경우도 부지기수로 벌어진다. 세월의 공백이 생겨도, 체감상 시간이 길게 느껴지지 않다보니 더욱 주변 사람들을 안 찾게 되는 것도 있다. 딱히 그 친구가 미워진 것도, 보고 싶지 않은 것도 아닌데, 살다 보면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싶은 것들이 종종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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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나도 뭔가 내 친구들을 한 자리에 모아 정기적으로 만남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명분'을 갖고 싶었다.

하지만 관심사도, 취미도, 성격도 모두 다른 고등학교 친구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공통 분모를 찾는 건 생각보다 어려웠다. 어쩌다 한 번 날을 잡고 보는 걸로는 관계의 지속성이 떨어졌다. 좀 더 우리를 끈끈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매개체가 필요했는데, 작정하고 찾아보려고 하니 막상 떠오르는 게 없었다.


하지만, 해답은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던 곳에서 나타났다.


3년 전만 해도 나는 친구들을 만날 때면, 꼭 한 명씩 만났다. 1:1 대화에 굉장히 강한 스타일이기도 하고, 상대방의 이야기에 집중하기 좋은 방법이라고도 생각해서 이러한 만남의 방식을 오랫동안 고수했다. 그런데, 어느 날 나는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예를 들어, 내 친구 A, B, C가 있다고 치자.

세 사람 모두 나와 매우 친한데, 그들 또한 모두 나 못지 않게 절친한 관계이다.

그렇다면, 나는 굳이 비효율적으로 이들을 따로 따로 만날 필요가 없다.

헌데 나는 왜 그동안 한 번도 세 사람을 다 같이 모을 생각을 안했던 거지? 이해가 안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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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렇게 피곤하게 살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나를 포함한 네 명의 고등학교 동창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고등학교 졸업 후 종종 여러 조합으로 만난 적은 있지만, 네 사람이 함께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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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난 '평양냉면'이라는 새로운 미식 세계에 완전히 매혹되어 이성을 반쯤 잃은 상태였다.

누가 'OO 먹으러 가자'라는 말만 해도, '평양냉면?'이라는 말도 안 되는 답변을 자동응답기처럼 내놓을 정도로 그 맛에 중독되어가던 시점이었다. (동문서답이 취미)


하지만, 평양냉면은 호불호가 크게 갈리는 음식 라인업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할 정도로 취향을 크게 타는 음식이 아니던가. 친구들과 만날 때마다 평냉을 먹으러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이 맛을 모르는 친구에게까지 무작정 권유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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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나의 평양냉면 극찬 선언이 친구 둘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데 성공했다.

입이 닳도록 찬양을 했으니 궁금해서라도 한 번쯤 그 맛을 경험해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린 네 명의 공식적인 첫 모임을 여의도의 '피양옥'에서 가졌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딱 6년 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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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신이 나서 끌고 왔지만, '맹물 같다'라거나 혹은 '걸레 빤 물 같다'라는 반응이 나올까봐 조금 우려가 되기도 했다. 평양냉면은 보기와 달리 가격이 비싼 편이기 때문에, 시켜놓고 음식이 입에 맞지 않을 경우 굉장히 난감해지기 마련이다. 나 역시 평양냉면에 입이 트이기까지 세 번의 시도가 있었기에, 평냉에 입문한 친구가 바로 적응을 못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우린 운이 좋았다.

친구가 그 깊은 맛을 바로 캐치한 것 같진 않았지만, 적어도 입문자가 느끼는 그 오묘한 풍미의 매력을 체험하는 데는 성공한 듯 보였다. 참고로 그 자리엔 내게 평양냉면을 처음 소개시켜준 친구도 있었다. 그 친구가 내게로, 그리고 내가 다른 친구 둘에게로 미식의 길을 전파하며 자연스럽게 우리는 다시 하나가 되었다. 고등학교 때 우리가 급격하게 친해질 수 있었던 것도,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던 공통의 매개체(언급은 할 수 없지만)가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수 년만에 우리의 우정을 지탱해줄 새로운 복숭아나무를 찾았다. 그렇게 평양냉면은 우리에게 운명처럼 다가왔고, '냉을 쫓는 사람들'의 여정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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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나의 시작은 이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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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로 우린 분기에 한 번씩 만나며 매번 다른 평양냉면집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서울에는 맛있기로 소문난 평냉집들이 많았고, 매번 새로운 가게에서 경험해보지 못한 맛을 접할 수 있다는 건 우리들의 모임 참석률을 높이는 최고의 원동력이 되었다. 겨우 '음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좋아하는 음식 하나가 우리를 한 데 모으는 제일 큰 명분이 되었으니 결코 '겨우'라는 표현으로 평가절하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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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냉면의 지속성은 실로 대단했다.

우리는 그때 이후로 2년간 계속 새로운 평양냉면집에서 모임을 가졌고, 지난 겨울부터 매달 마지막 주 주말에 '월간 평냉미식회'를 갖기로 결정하며 이젠 완연한 정기 모임이 되었다. 맛있는 냉면을 먹기 위해서라도 모임에 참석할 것이기에, 평양냉면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우리들의 우정이 박살나는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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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도대체 '평양냉면'이 어떠한 존재이길래 우리들을 이렇게 단단한 관계로 만들고, 광적으로 한 음식에만 집착하도록 이끈 것일까. 앞으로 자칭 평냉 매니아 4인이 써 내려가는 무작정 냉면 랩소디 '냉을 쫓는 사람들'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정말이지, 의식의 흐름대로 쓴 것 같다. 앞으로 잘 쓸 수 있을까? 하찮은 필력이 심히 걱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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