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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opofilm Jan 23. 2021

[영화 리뷰] 윤희에게 (2019)

은은하게 세공해 놓은 사랑의 잔상 (넷플릭스/김희애/여성퀴어영화)

윤희에게, <캐롤>의 한국 버전

 소복하게 쌓인 하얀 눈밭 배경이 가져다주는 완연한 겨울의 감성, 은은하게 퍼져 나가는 사랑의 잔상을 담아냈던 영화 <캐롤>을 국내 버전으로 재해석한다면 이러한 느낌일까. 영화는 은은함과 잔잔함 그 자체로 전개되지만, 지루하지 않게 인물들의 감정선에 천천히 스며들 수 있도록 유도한다. 단 한 순간도 자극적인 면이 없고, 감정적으로도 담백하게 접근한다는 점에서 슴슴하지만 깊은 여운을 선사하는 일본 영화의 분위기가 제법 많이 느껴지기도 한다. 두 중년 여성이 주인공인 여성퀴어 영화로 좀 더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 퀴어 요소가 그닥 진하게 베어있지는 않다. 소재 정도로만 쓰였을 뿐, 전반적인 메시지는 가족관계, 친구관계, 연인관계에도 모두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20년만에 찾아온 친구의 편지

 어느 날, 일본 오타루에서 '윤희(김희애)'에게 편지 한 통이 찾아온다. 그 편지를 펼쳐본 것은 윤희의 딸인 '새봄(김소혜)'. 20년 전 헤어지게 된 친구를 향한 그리움과 추억의 스토리가 편지 한 폭에 진하게 담겨져 있다. 단순히 친구에 대한 그리움을 담았다기엔 애틋한 정서가 흐르는 편지. 편지 속 주인공 윤희는 현재 어떻게 살고 있을까.

 남편과 이혼한 후 딸 새봄을 홀로 키우는 윤희는 급식소 조리원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하루하루에 큰 의미를 두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다. 술만 마시면 찾아오는 전남편은 지겹기만 하고, 웃을 일도 없지만 새봄이를 위해 매일같이 열심히 일을 해야만 한다. 자신의 인생은 내팽개치고 오로지 자신의 뒤치닥거리만 하는 엄마에게 마음이 쓰였던 새봄은 편지를 몰래 읽어본 후 엄마에게 일본여행을 같이 가자고 제안한다. 행복하지 않아 보이는 엄마가 편지를 보낸 옛 친구 '쥰(나카무라 유코)'을 만났으면 하는 바람에서 비롯된 제안이었다. 20년이 지나도, 윤희의 꿈을 꾼다며 짙은 애정을 표현한 친구 쥰. 오랜 시간이 흘러도 마음 한 켠에 자리잡고 있었던 추억에 대한 그리움이 편지 한 통을 통해 다시 한 번 일렁이기 시작한다.

소수자들의 이야기, 시선의 확장

 우선, 제작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국내 영화계에서 두 명의 중년여성을 주인공으로 하는 퀴어영화를 쉽게 제작하려 했을 리가 무방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개봉에 성공한 <윤희에게>에 대한 반응은 상당히 호전적이었고, 앞으로도 이런 영화들이 국내에도 많이 제작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었으면 한다.

 사실, 퀴어영화는 2010년대에 들어서 해외는 물론 국내에서도 제법 많이 제작되기 시작했고, 질적으로 우수한 작품들이 많이 나오면서 제법 대중에게 익숙해졌다. 하지만, 중년 여성의 사랑을 다룬 퀴어영화는 늘 관심 밖의 이야기가 아니었나 싶다.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담고자 한 <윤희에게>는 이들의 이야기들을 꺼내 조명하며 관객들로 하여금 시선의 확장을 불러일으킨다. 왜 우리 부모님 세대에서의 동성에 대한 사랑은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던 것일까? 여전히 내 사고의 폭은 좁은 바운더리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줬다.

이게 뻔하다고? 도대체 어디가..?

 쥰과 윤희의 감정선이 극을 관통하고는 있지만, 정작 두 사람이 만나는 장면은 매우 잠깐에 불과하다. 심지어 둘이 함께 섞는 대화조차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두 사람의 진심은 오로지 서로에게 20년만에 전하는 편지를 통해서만 드러나고, 그저 풍경과 이들의 표정, 그리고 음악과 미장센을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나타날 뿐이다. 극적인 전개가 등장하지 않고, 어떠한 관계 속에서도 통용될 수 있는 스토리의 잔잔한 흐름이 나타난다는 이유로 뻔하다는 시선이 뒤따르기도 했다.

 하지만, 이 또한 퀴어영화를 바라보는 일종의 편견에서 비롯된 잣대일 수 있다. 동성애를 다루는 수많은 영화들은 대개 등장하는 인물들을 성적 대상화하거나 이들의 사랑을 자극적으로 포장하여 과한 이목을 집중시킨다.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불편 어린 시선들을 비판하고자 하는 의도로 영화를 만들었겠지만, 이 또한 역설적으로 일종의 차별적 요소로 작용해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윤희에게>는 동성애 자체에 크게 무게중심을 두지 않고, 비움의 미학을 택했다는 점에서 전혀 뻔하지 않다. 굳이 자극적이고, 강조하는 방식을 택하지 않아도 충분히 밀도 있는 스토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랑은 이미 스며든 잉크 같은 것

 쥰과 윤희는 한때 서로 금기된 사랑을 했던 관계이지만, 20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만나지 못했다. 하지만, 20년만에 쓴 편지와 잠깐의 극적인 만남은 그동안 마음 속에 품고 살았던 그리움과 서글픈 애정이 사무치게 만든다. 그리움의 감정은 꼭 어딘가에 서서 상대방이 오기만을 평생 목이 빠져라 기다리는 것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평상시처럼 밥도 잘 먹고, TV도 보고, 회사에 다니며 일도 하지만 마음 한 켠에 응어리져 남아 있는 게 그리움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잘 살고 있다고 해서 누군가와의 추억을 잊고, 기다림을 포기했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쥰과 윤희 역시 이러한 의미로 서로를 20년동안 한 번도 잊지 못했다는 표현을 사용했다고 본다.

 이미 지우려 해도 지울 수 없는 잉크처럼 스며든 감정을 어찌 잊을 수 있겠으랴. 애써 지우려 할수록 옷에 묻은 잉크가 번져 나가는 것처럼, 제 3자의 억압과 주변환경의 한계는 이들의 감정을 더욱 애달프게 만들었다. 자신의 삶 자체를 힘들게 만들었음에도, 잊을 수 없는 사랑하는 존재. 20년만의 만남이 성사되는 순간, 만감이 교차하고, 이들의 덤덤하면서도 뜨겁게 일렁이는 감정은 곧바로 관객에게 전달된다.

새봄이 가져다 준 '새 봄'과 행복

 극을 이끄는 건 김희애와 나카무라 유코이지만, 윤희의 딸로 등장하는 김소혜의 역할도 매우 중요했다. 다소 늘어질 수 있는 전개 속에 가벼운 유머를 첨가하며 이완의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다. 배역의 이름이 괜히 '새봄'으로 정해진 게 아니다. 새봄으로 하여금 윤희는 사랑했던 친구를 다시 만났고, 처절했던 삶을 털고 일어나 자신의 행복을 찾아나갈 희망을 되찾았다. 즉, 새봄이 윤희로 하여금 '새 봄'을 가져다 준 셈이다. 너무나 예상 가능한 설정이긴 했지만, 마냥 철없어 보이는 딸이 사실은 누구보다 예민하고 섬세하게 엄마를 간파하고 있었다는 따뜻한 마음을 전하며 의미를 더해주었다. 늘 엄마에게 마음의 빚을 지고 있다고 느꼈던 새봄이 엄마를 위해 용의주도한 작전을 귀엽게 펼치고, 뒷편에서 엄마를 든든하게 응원해주는 모습이 너무나도 예쁘고 따수웠다.

<러브레터>를 떠올리게 만드는 풍경

 마지막으로, 극의 배경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윤희에게>는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촬영된 작품이라 극중 쥰이 살고 있는 일본 홋카이도의 오타루 지역의 비중이 매우 크다. 하얗게 눈덮인 일본 시골 마을의 풍경과 아름다운 자연 경관은 마치 없었던 첫사랑의 감정도 떠올리게 만들 정도로 감성을 자극하는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쥰이 윤희를 찾아온 게 아닌, 윤희가 오타루로 쥰을 찾아가도록 스토리를 설정한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쉽게 녹아버리고 마는 눈처럼 속은 누구보다 여리고, 마음의 상처도 많은 윤희가 하얀 설원을 찾아가 눈과 같았던 자신의 모습을 녹이는 대신, 따뜻한 봄을 얻어 돌아온다는 이야기에 설득력을 더해주었기 때문이다.

 눈이 오는 어느 날 저녁, '윤희니?' 한 마디를 떨어뜨리자마자 20년 간 쌓아온 감정의 눈덩이는 한 순간에 녹아버린다. 더 이상의 말도, 설명도 없었지만 배경만으로 충분히 모든 게 전달이 된다. 감정의 과잉 대신 담백한 절제를 택했지만, 배경이 담고 있는 영상미가 진한 감정의 몰입을 강하게 이끌어주었다. 괜히 이 장면에서 눈물을 흘리는 관객들이 등장한 게 아니다. 추운 겨울 일본의 배경이 감정적으로 가져다줄 수 있는 극적 효과를 아주 영리하게 활용하며 관객의 마음 속을 깊이 파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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