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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opofilm Jan 29. 2021

[영화 리뷰] 소울 (2020)

더 이상의 인생수업은 그만 (디즈니 픽사 애니메이션)

평단의 호평 속 개봉한 <소울>

 디즈니 픽사의 신작 <소울>이 평론가들을 비롯한 업계 종사자들의 엄청난 호평과 함께 개봉을 했다. 일반인 관람객들의 평가 역시 대부분 별점 4~4.5점을 웃돌며 호평일색이다. 애니메이션 작품임에도 2021 아카데미 작품상 유력 후보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근래 제작된 애니메이션 영화들 중 가장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사실 그래서 리뷰를 쓰는 게 조금 조심스럽다. 지금까지 그래도 제법 많은 영화를 봐왔는데, 작품에 대한 대중의 전반적인 평가와 내 반응이 크게 달랐던 적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소울>의 경우 평단의 극찬으로 인해 꽤나 큰 기대감을 안고 감상을 했는데 평론가나 일반 대중의 평가에 크게 공감할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리뷰는 그 어느 때보다 개인적인 입장에서 포스팅 될 듯 하다.

죽고나니 너무도 허무했던 인생 (스포일러 절반)

 주인공 '조 가드너'는 재즈 뮤지션으로서의 삶을 꿈꾸지만, 현실적인 이유로 학교에서 시간제 음악 교사로 일을 하고 있다. 그러한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던 와중에 우연히 재즈클럽에서 유명 재즈 뮤지션 '도로시 윌리엄스'와 함께 공연할 기회가 운좋게 생기게 된다. 예상치 못한 사건에 기뻐 날뛰던 그는 미처 주위를 살피지 못했고, 맨홀에 빠져 하루아침에 죽음을 맞는다.

 자신의 인생 최고의 날, 예상치 못한 죽음으로 영혼이 되어버린 조. 그는 머나먼 저 세상(the great beyond)으로 가는 길에 영혼의 상태로 놓여 있게 된다. 비참한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는 이성을 잃고 길을 역행했고, 태어나기 전 세상(the great before)으로 떨어지게 된다. 시스템의 오류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영혼들을 교육시키는 '유 세미나(U Semina)'의 멘토가 된 조는 골칫덩이 고인물 영혼 22의 멘토를 맡게 된다. 태어나고 싶지 않은 22와 다시 지구로 돌아가고 싶은 조는 지구 통행증을 두고 서로 윈윈하는 거래를 계획하지만, 조의 경솔한 행동으로 계획에 차질이 발생한다.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허무하게 죽어버린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일 수 없는 조. 다시 자신의 영혼을 원래대로 돌려놓고, 인생 최고의 날을 되찾기 위한 조의 고군분투 여정이 본격적으로 이어진다.

뻔한 교훈, 주입식 메시지

 <소울>은 제법 복잡한 세계관과 현학적인 방식으로 영화의 스토리를 진행했지만, 말하고자 하는 교훈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목적이나 명분, 가치, 꿈, 의미 같은 것을 너무 좇지 마라. 꼭 목적 있는 삶만이 의미가 있는 게 아니다. 거창한 목표나 꿈을 위해 살기보다는, 현재의 일상 그대로를 즐겨라. 2시간의 러닝타임동안 영화가 설파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딱 이 정도다.

 메시지는 좋다. 일상의 소중함을 알지 못한 채 스스로가 정해놓은 목표나 미래만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한번쯤 인생을 되돌아볼만한 기회를 짧게나마 마련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급했다시피 너무나 단순하고 뻔한 메시지를 굳이 가상세계와 복잡한 세계관까지 끌고 와서 전달하려고 하다보니 교훈을 주입시키려는 경향이 굉장히 강하게 느껴진다. 이 메시지를 통해 이 영화는 어른들에게 희망을 주고자 하는 작품이며, 우리의 인생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는 내용을 너무 대놓고 지나치게 강조한다. 메시지는 은은하고 간접적으로 전달해야 더욱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와닿을 수 있는 법인데, <소울>의 방식은 너무나도 직접적이다.

일상의 아름다움, 우리에게 와닿을까?

 '조'는 22가 획득한 지구 통행권을 통해 다시 자신의 몸으로 돌아와 꿈에 그리던 재즈 클럽에서 성공적으로 공연을 마친다. 하지만, 일생을 꿈꿔왔던 인생 최고의 날을 막상 보내고 나니 생각만큼 기분이 즐겁진 않았던 모양이다. 집으로 돌아와 22의 흔적들을 보고 맛있는 피자와 사탕, 떨어지는 나뭇잎과 같은 일상의의 사소함에서 행복감을 느꼈던 그를 떠올리며 목적 있는 삶만이 의미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고는 다시 사후세계로 돌아가 22에게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며 통행권을 돌려준다.

 굉장히 공감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그 공연 한 번 하자고 온갓 쇼를 다 하며 동앗줄을 잡는 심정으로 아등바등하던 그였는데, 공연 하루만에 현타를 제대로 느껴버린다. 무엇보다 그렇게 어렵게 얻어낸 기회를 단 하루만에 22에게 다시 자발적으로 돌려준다는 전개는 더욱이 이해할 수 없었다. 조가 현타를 느낀 지점은 평생을 꿈꾸던 목적을 이뤄도 실상은 큰 변화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과 오히려 일상의 사소함에서 큰 행복감을 느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좌절할 수밖에 없는 인생을 살아가더라도 그 인생을 마냥 아름답다고 할 수 있을까? 너무나도 순진하고, 애니메이션스러운 결론이다.

 22가 일상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22가 인간세계에 처음으로 내려왔기 때문이다. 일상의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하고, 재밌어보였을 수밖에 없다. 22가 조의 몸으로 들어가 연주자가 되지 않고, 계속 그의 좌절스러운 인생을 살아갔더라면, 22가 경험했던 인간세계의 일상이 더 이상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조가 22로 인해 일상의 목적 없는 행동들이 때로는 행복감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그가 어렵게 잡은 기회로 인해 매일 같이 앞으로 재즈 클럽에 가서 하게 될 똑같은 공연도 그에겐 소중한 일상이 되어줄 것이라는 것을 동시에 깨달았어야 했다. 조는 자신의 꿈을 사랑했다기보다는 음악 그 자체의 본질을 사랑한 인물이다. 그런데, 꿈을 쟁취해 버린 그 순간 공허함과 허탈감만을 느낀다는 것은 조라는 인물을 한순간에 음악이 아닌 꿈을 쟁취하는 것에만 매력을 느낄 줄 아는 인물로 만들어버린다.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 꿈을 위해 노력했던 인물이 한순간에 자신의 삶을 다시 포기한다고 결정하는 것은 인물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봤을 때, 공감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매력 없는 주인공

 <소울>이 결정적으로 재미가 부족했던 것은, 주인공의 매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귀엽고 잔망스러움을 어필할 수 있던 영혼 캐릭터들이 없었다면, 극의 재미는 더욱 반감되었을 것이다.

 주인공 '조'는 자신의 죽음에 너무나도 큰 억울함을 느낀 나머지 자신의 인생만이 가장 중요하다. 언제나 모든 캐릭터는 뒷전이고, 재즈와 음악, 내 꿈, 내 인생만을 입이 닳도록 이야기하며 질주해나간다. 죽기 전의 모습도, 죽은 이후 고양이나 영혼이 된 모습에서도 '조 가드너'라는 인물의 매력을 어디서 찾아야 할지 도무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그와 정반대의 성향을 지니고 있던 22의 등장은 그나마 작품의 무료함을 해소시킬 수 있었다.

 좀 발언의 수위를 높여서 이야기해보겠다. 주인공은 오로지 자신의 인생을 다시 돌려놓는 것만이 중요하기에 사후세계 시스템을 불법으로 악용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다른 캐릭터들에게 생기는 불이익에는 전혀 책임 또한 지지 않는다. 22를 비롯한 주변인물들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꿈을 이루는데 성공하는데, 막상 꿈을 이루고 나니 기분이 또 별로다. 몇 시간만에 현타를 느낀 것이다. 원하는 대로 다 됐음에도 그는 아무것도 변한 게 없고, 그렇다고 앞으로 삶을 살아가기 위한 무언가의 깨달음을 얻지도 못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기적인 이유로 막무가내 스토리를 전개하는데, 그 캐릭터가 매력마저 없다. 캐릭터의 매력이 가장 중요한 애니메이션 영화에겐 치명적인 단점으로 작용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근래 감상한 애니메이션 영화에 등장한 주인공 중 역대급으로 캐릭터가 무매력이었다.

경지에 이른 상상력 but 허술한 세계관

 그렇다면, 상상력의 범주를 사후세계까지 확장시킨 <소울>의 세계관은 어떠할까. 솔직히 그래픽과 아이디어 측면에서는 살짝 감탄이 나왔다. 픽사 애니메이션의 상상력에는 한계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듯, 소재가 신선했고 애니메이션에 영혼 캐릭터를 등장시키는 날이 올 것이라곤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훌륭한 아이디어와 그래픽에 비해 세계관의 구성은 굉장히 허술한 편이다. 아무리 애니메이션일지라도, 나름 사후세계라는 가상의 세계인데 구멍이 너무나도 많고 관리자들은 멍청하기 짝이 없다. 죽음에 대한 동양과 서양 문화권의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된 결과물일지도 모르겠지만 동양문화권 만큼 사후세계에 대한 성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느낌이었다. 스토리상 어쩔 수 없었겠지만, 극중 억울한 죽음을 당한 사람은 오로지 '조 가드너' 뿐이다. 솔직히 죽음 앞에 억울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으랴. 억울함에 몸부림쳐 사후세계 시스템을 맘껏 망가뜨리는 '조'와 그를 제대로 통제조차 하지 못하는 '테리'의 모습은 망자를 찾아 필사적으로 잡으러 다니는 <신과 함께> 속 차사들과 극도로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아무리 애니메이션이라지만, 죽음과 사후세계를 중심소재로 삼을 계획이었다면, 조금은 진지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허술한 세계관을 통해 성인 관객들에게 가르침을 주려하는 태도는 픽사의 자의식 과잉으로 느껴졌다.

지금을 즐기기엔 너무나도 각박한 현실

 왜 이렇게 <소울>을 통해 사람들이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하는지 솔직히 아직까지도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사실 하나의 목적만을 향해 좇는 삶보다 일상의 사소한 것들이 행복할 때가 있다는 것은 우리가 평소에도 충분히 느끼고 사는 것들이 아닌가? 그렇다고 일상도 충분히 아름다고 행복하니 지금 현재를 충분히 즐기라는 메시지는 현실의 우리에게 무언가 자극을 주기엔 영 힘이 없는 메시지다. 아무리 일상이 아름답다고 한들, 그 일상이 좌절과 무력감의 연속이라면 누구든지 행복을 느낄 수 없다. 지금 현재를 그대로 즐기라 한들, 뼈빠지게 일하고, 공부하고, 버텨내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내 일상은 크게 바뀌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속 편한 사람들의 껍데기만 번지르르한 설교일 뿐이다. 현재를 즐기지 않는다고 해서 무언가 목적을 향해 노력하는 누군가의 고된 삶까지무의미한 것으로 치부하지는 않았으면 한다. 누군가의 일상이 소중하다면, 누군가의 목적을 위한 삶도 동일하게 소중하다. 물론, 힘들고 지칠 때 <소울>이 주고자 하는 메시지가 잠깐의 휴식처나 위로의 역할 정도는 해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만한 강렬한 자극제가 되어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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