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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opofilm Feb 10. 2021

[드라마 리뷰] 런 온 (JTBC)

가슴 따뜻해지는 착한 드라마 (임시완/신세경/최수영/강태오)

착한 희귀종 드라마 발견, <런 온>

 자극적인 막장 드라마와 서스펜스 가득한 스릴러 장르물이 판을 치는 요즈음, 큰 사건 없이 따뜻하고 착한 스토리만으로 극을 전개하는 보기 드문 드라마 한 편이 나타났다. 탄탄한 배경의 육상선수 남자 주인공과 영화 번역가 여자 주인공의 로맨스와 성장, 휴머니즘을 그린 이 작품은 여타 드라마처럼 사건성에 치우치지 않고, 오로지 인물들의 성격과 관계성에 집중하며 극을 전개한다. 고로 자극적인 면이 덜하고, 드라마로서 극적인 장면들이 등장하지 않다보니 한드에 익숙한 시청자들에겐 제법 낯선 작품일 수 있다. 대본과 배우들의 연기력 모두 탄탄하게 안정적임에도 시청률에서 재미를 못본 것 역시 이 이유에서이다. 하지만 <런 온>이라는 드라마, 참 알면 알수록 빠져들게 되는 작품이다. 그 진가를 알기 위해서는 최소 5~6회까지는 보아야 하는데, 뒤늦게 알게 된 매력의 중독성이란 짜릿하다.

로맨스에 소모되지 않는 직업

 <런 온>이 보통의 로맨스 드라마와 차별화를 둔 부분은 바로 주인공들의 직업을 로맨스를 위한 도구로 활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로맨스물에서 주인공들의 직업이 단지 극의 배경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만 등장한다는 게 한국 드라마의 고질적인 문제점인데, <런 온>에서는 남자 주인공 '기선겸(임시완)' '육상'과 여자 주인공 '오미주(신세경)'의 '영화 번역'이 아주 큰 비중으로 다뤄진다. 그리고,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주인공들의 태도 또한 매우 현실적이면서도 건강하다. 극중 주인공들은 사랑도 중요하지만, 자기 자신이 더 소중하기 때문에 자신이 해내는 일을 우선시 하고, 끝까지 지키려는 마인드를 고수한다. 그리고, 사랑을 하면서도 일에 대한 중심을 절대 놓지 않는다. 특히 '기선겸' '오미주' 캐릭터가 그러한데, 이 중심이 흐트러지지 않기 때문에 두 사람의 애정 전선은 여태껏 보아왔던 그 어떠한 로맨스극의 커플들보다 바람직하게 느껴졌다.

클리셰 뒤집기 ①: 올곧은 순둥이 남주, 기선겸

 <런 온>은 로맨스 드라마의 클리셰 뒤집기에 큰 공을 들였다.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캐릭터는 '임시완'이 연기한 육상선수 '기선겸' 캐릭터다. 기선겸은 한국 로맨스 드라마에서 보기 드문 순둥이 남주다. 그것도 그냥 착하기만 한 게 아니라 심성이 선하고, 올곧은 신념을 갖고 있으며 절대 감정이 앞서지 않는다. 보통 로맨스극에서는 나쁜 남자, 혹은 무뚝뚝한 츤데레 스타일의 남자들이 매력적으로 그려져 왔기 때문에 다정하고 반듯한 스타일의 '기선겸'은 입체적으로 그리기에 쉽지 않은 인물이다. 하지만, 그 어려운 걸 임시완과 <런 온>이 함께 해낸다. 

 기선겸과 러브라인으로 등장하는 오미주는 기선겸에 비해 제법 현실적인 캐릭터다. 그래서 극중 삐지기도 하고, 화도 내고, 자신의 감정이 가는대로 행동하며 둘의 관계를 흔들어놓기도 한다. 보통의 남주라면, 이럴 때 여주에게 화를 내거나 한번쯤 강한 감정으로 나갈 법도 한데 기선겸은 단 한번도 자신의 감정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이지 않는다. 역정을 내기보다는 상대방을 배려하고, 오히려 자신이 먼저 사과를 한다. 어찌 보면 그리 대단한 건 아니지만, 로맨스 드라마 속 남주의 전형을 살펴봤을 때 꽤나 신선한 작법이다. 물론, 너무나도 올곧고 바른 심성으로 살아온 인물이라 초반에 답답함을 주기는 했지만 오미주와의 관계가 발전해나갈수록 감정 표현에 대해 배우고, 상대방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갈 줄 아는 모습으로 내적인 성장까지 일궈낸다. 오미주의 표현대로 육아의 감정을 느꼈을 수도 있지만, 쉽지 않은 심리적 성장 과정을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빠르게 보여주는 모습은 과연 이 시대의 바람직한 남자 주인공의 모습이다. '기선겸'으로 전한 클리셰 탈피는 뻔하디 뻔한 작법의 전개를 고수하는 수많은 로맨스 드라마들이 귀감을 삼아야 할 인물이다.

클리셰 뒤집기 ②: 로맨스 남주 설정 몰빵, 서단아

 기선겸은 인물의 성격을 통해 클리셰를 살짝 비튼 캐릭터였다면, 극중 서브 여주로 등장하는 '서단아(최수영)' 캐릭터는 클리셰를 아예 정반대의 수준으로 뒤집어 버린다. 이복형제와의 승계권 갈등, 재벌 2세, 일 잘하는 능력자, 위기 사건에서의 해결사 등 보통 로맨스 드라마에서 남자 주인공이 가져갈 만한 포지션과 스펙을 서단아에게 몰빵했다. 이 자체만으로도 상당히 신선한 설정인데, 러브라인인 '이영화(강태오)'에게 내뱉는 대사나 기선겸, 오미주와 같은 인물에게 하는 대사까지 모두 보통의 남자 주인공이 할 법한 대사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동안 숱한 로맨스 드라마에서 답답하리만큼 등장했던 요소들을 한 번에 뒤집어 버리며 사이다를 선사하는 '서단아' 캐릭터는 당연히 엄청난 매력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이 캐릭터를 소화하는 배우 '최수영'과 연기력과 대사 전달력이 매우 찰지다. 이렇게나 재벌 2세 역할이 잘 어울렸나 싶을 정도로 연기를 잘하다보니 '서단아'라는 인물로 살릴 수 있는 매력은 배가 되어 나타난다. '기선겸'과 '서단아'는 일반적인 캐릭터의 전형에서 성별과 포지션만 바꾸었을 뿐인데 이 점이 매우 신선하게 다가오면서 극에 강한 흥미를 불어넣는다.

다양성과 존중, 모두의 삶을 소중하게

 <런 온>이 착한 드라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은 바로 다양성에 대한 존중에 있다. 보통의 로맨스 드라마는 주인공 둘, 서브 주인공 둘을 설정하고 네 명의 인물을 삼각 혹은 사각관계로 묶는다. 그리고, 그 외 조연 캐릭터들은 주인공들의 러브라인을 위한 장치적 요소로 활용할 뿐이다. 하지만, <런 온>은 아무리 작은 비중의 캐릭터일지라도 한 사람의 인생을 허투루 대하지 않는다. 모든 인물에게 그에 맞는 서사를 부여하고, 극의 마지막까지 그들의 이야기도 함께 끌고 나간다. 50부작 주말드라마면 몰라도, 16부작 미니시리즈에서는 주인공들의 이야기만 그려내기에도 분량이 벅차기 때문에 쉽게 해낼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런 온>은 모든 캐릭터 하나하나를 소중하게 대하는데, 이러한 부분에서 사람을 대하는 작가의 따뜻한 태도를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회에서는 미주의 절친 '매이(이봉련)'의 사랑, 선겸 부모님의 화해, 커밍아웃한 '예준(김동영)'과 그의 엄마 '동경(서재희)'의 속풀이 등 모든 캐릭터에게 그에 맞는 결말을 부여했으며 하물며 특별출연 하는 바텐더(김원해)까지 놓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답답할 정도로 착한 연출이지만, 작가의 올곧은 신념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여전히 보수적인 국내 드라마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어느 정도의 PC함을 보유하고 있는 것도 눈길을 끈다. '이영화(강태오)'의 친구 '고예준(김동영)'은 친구를 좋아하는 게이로 등장하는데, 그를 대하는 주변 인물들의 태도가 매우 성숙하고 올바르다. 특히 극중 결혼을 피하기 위해 레즈비언이라고 거짓 커밍아웃을 한 서단아가 고예준에게 사과를 한 것이 꽤나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지금껏 수많은 드라마에서 거짓 커밍아웃을 개그 요소로만 썼을 뿐 그 이상으로 이야기를 전개한 적이 없었는데 이 작품은 그 세심한 부분까지도 신경을 쓴다. 무성애자로 등장한 '매희(이봉련)' '정실장'과 연애를 하게 되는 전개 역시 무성애자라고 로맨스까지 거부하는 건 아니라며 잘못된 성적 편견을 고쳐주기도 한다. 이렇게까지 세심하게 인물들을 다루는 국내 작품을 지금껏 본 적이 없어 <런 온>의 섬세함이 유독 감명 깊게 다가왔다.

수많은 영화 오마주, 소소한 재미

 극중 '오미주'가 영화 번역가로 등장하는 만큼 영화에 대한 내용이 자주 나오는데, 그 때문인지 특정 영화를 오마주하거나 패러디한 장면들이 제법 많다. 단순히 장면 하나를 오마주하는 게 아니라 의상, 배경, 콘셉트까지 영화의 장면을 그대로 가져와 패러디하기 때문에 원작 영화를 떠올리며 극을 감상하는 재미가 매우 쏠쏠하다. 첫 회에서 '임시완'이 직접 본인이 등장한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을 패러디한 장면이나 오미주의 상상씬에서 등장한 <내 머릿속의 지우개>와 <달콤한 인생> 등의 패러디 씬은 시트콤 수준의 큰 재미를 선사한다. <카사블랑카><E.T><싸이코><늑대의 유혹> 등 거의 매회 이런 오마주 씬들이 등장하는데 원작 영화를 모른다면 재미가 반감될 수도 있기는 하다. 후반부에는 '육지우(차화연)'이 출연하는 <코드네임, 캔디> 영화를 전적으로 활용하는 등 작가가 영화에 누구보다 진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장면들이 넘쳐 흐른다.

번역가가 주인공인 진짜 이유

 극을 보기 전, 인물 설정만 놓고 봤을 때 도대체 육상선수와 영화 번역가에게 어떠한 접점이 있길래 이들을 주인공으로 설정했을까 의문이 들기 마련이다. 실제로, 극중 기선겸은 영화에 대해 문외한이라 오미주와 초반에 대화가 막힐 때가 많다. 하지만, 작품을 끝까지 보고 나니 왜 작가가 주인공들의 직업 설정을 이렇게 했는지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모든 사람들은 각자 저마다의 배경, 직업, 관심사, 취향 등을 갖고 살아왔고 그렇기 때문에 절대 서로를 완전하게 이해할 수는 없다. 사람들이 싸우고, 갈등하고, 부딪히게 되는 것은 그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각자의 것을 상대방에게 요구하거나 이해를 강요하기 때문인 것이다. 기선겸과 오미주 역시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살아온 인물이다. 이들 역시 초반에 나름 갈등이 생기기도 하고, 대화도 한 마디 할 때마다 턱턱 막히며 서로를 이상한 사람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이들은 상대방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 해서 서운해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자신만의 번역을 통해 상대방과의 단절을 풀어나간다. 이 과정에 있어 평소 번역 작업을 하던 오미주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해지는데, 오미주가 영화를 번역하듯 기선겸에게 맞춤형으로 다가가고, 그의 마음을 열어주면서 기선겸 역시 오미주와 대화가 제법 잘 통하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된다. 기선겸과 오미주의 극 초반 대화씬과 극 후반부의 대화씬을 비교해보면, 작가가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매우 분명해진다. 서로를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고, 소통 방식을 바꾸려 의도적인 노력을 가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사랑을 통해 통역될 수 있음을. 이 주제가 주인공 커플의 성장을 통해 매우 분명하게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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