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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opofilm Feb 10. 2021

[영화 리뷰] 찬실이는 복도 많지 (2019)

다시 일어설 그대에게 보내는 응원 (강말금/윤여정/김영민/독립영화)

한순간에 사라진 목표, 내 인생은 어디에

 영화 프로듀서로 오로지 일생을 일에만 몰두했던 '이찬실(강말금)'은 하루 아침에 자신과 오랫동안 일해온 감독이 사망하게 되면서 일자리를 잃는다. 기쁜 마음으로 고사 뒷풀이를 하던 그 영화는 바로 엎어졌고, 친한 여배우 '소피(윤승아)'의 집에서 가사도우미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처지로 전락한다. 어딘가 불편하게 하는 주인집 '할머니(윤여정)'와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듯한 소피의 불어선생님 '김영(배유람)'까지. 위기와 근심걱정은 한 순간에 휘몰아친다. 하지만,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듯이 주인집 할머니는 생각보다 따뜻했고, 연하남 영은 수년간 죽어있던 연애세포를 깨워줄 정도로 설렘을 일으켜준다. 그리고 존재 자체가 요상하지만 의외로 자신의 고민을 잘 들어주는 의문의 유령 '장국영(김영민)'까지. 인생의 벼랑 끝에 서 있는 찬실에게 다시 복이 찾아오려는 것일까?

존재론적 회의감, 고민과 성찰의 시기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40이라는 애매한 나이에 갑자기 경력이 단절된 한 여성이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고 앞으로의 인생을 어떻게 헤쳐나갈지에 대한 고민과 성찰을 해내는 작품이다. '찬실'은 평생을 같은 감독과 영화 제작을 하며 살아갈 작정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전부와도 같았던 영화 일이 갑자기 사라진 것은 청천벽력과도 같다. 모든 걸 포기하고, 비관하고 싶은 시기에 '찬실'은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으며 다시금 일어설 준비를 한다. 극중 '찬실'이 대화하고,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들은 그가 또 한 번의 성장을 해내는 데에 좋은 밑거름이 되어준다.

 불어, 기타 등 쉴 새 없이 새로운 것을 배우며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소피는 영화라는 한 우물만 파고 살아온 찬실과 확실히 다른 인물이다. 하지만 그 역시도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 잠깐이었지만 찬실에게 설렘을 만들어준 김영은 연애 한 번 못하고 일에만 몰두하며 살아온 과거의 삶을 되돌아보게 해주고, 그와 영화 이야기를 할 때면 자신이 영화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상기시킨다. 단지 영화 취향에 대한 대화를 했을 뿐인데, 극도로 흥분하며 대화에 몰입하는 찬실의 모습은 그녀가 영화에 얼마나 진심이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가장 힘든 시기에 자신에게 따뜻한 위로를 건네준 할머니와 장국영은 영화만을 바라보고 살아온 찬실의 인생이 전혀 헛되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찬실이 다시 영화 일을 통해 일어설 수 있는 결정적인 힘을 제공한다. 90분이라는 러닝타임 내내 별다른 사건 없이 전개되지만, 찬실은 주변 인물들의 작은 관계에서도 상당한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존재론적 회의에 대한 성찰을 마친 그 시점부터 새로 시나리오를 쓰며 인생 2막을 시작한다.

크리스토퍼 놀란과 오즈 야스지로

 김영과 찬실이 영화 취향에 대화하는 장면은 이 작품의 감상평에서도 가장 많이 거론될 정도로 강한 각인을 만든 장면이다. 복잡한 연출과 화려한 영상미로 눈길을 끄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는 김영과 잔잔한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는 찬실의 취향은 그야말로 상극이다. 단지 영화 취향일 뿐이지만, 두 사람은 제법 극명한 의견 대립을 펼치는데 이 장면이 등장한 이유는 무엇일까.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두 작품 중 '오즈 야스지로' 감독 성향에 좀 더 가까운 작품이다. 따라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작품을 좋아하는 관객들이라면 이 작품에 대해 지루하다는 평을 늘여놓을 수 있다. 극중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영화를 치켜세우며 자신의 취향을 적극 대변하는 찬실의 표현은 결국 <찬실이는 복도 많지> 같은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취향을 대신 말해주는 것과도 같다. 지루하고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고 까기 마련이지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에 꿈과 목표를 잃어버렸는데 어찌 아무 일도 안 일어났다고 할 수 있을까. 감독 스스로가 주인공을 통해 이 작품이 왜 좋고, 왜 영화화 되어야 했는지를 열띤 마음으로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느낌이 든다.

지루해서 못 보겠어,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썩 재미있는 영화는 아니다. 극 후반부에 소피가 찬실이 쓴 시나리오를 보고 "도저히 지루해서 못 읽겠어"라고 하는데, 이는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보고 느낀 감상평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듣는 순간 퍽 공감이 가지 않을 수 없는 대사였다. 하지만, '찬실'이라는 인물을 연기한 '강말금' 배우의 연기력이 극에 엄청난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마흔이라는 나이에 일자리도 잃고, 남자도 없고, 집도 없고, 돈도 없는 우울할 수밖에 없는 인생의 실패자로 그려지기에 충분한 인물이지만, 그가 연기한 찬실은 의외로 러블리하고, 활력도 있고, 부드럽다. 배우의 연기력이 워낙 다채롭다 보니 극중 등장하는 배우들과의 케미가 매우 조화롭고, 별 특징 없는 일상적인 장면들에서도 소소한 재미가 나타난다. 괜히 이 배우가 마흔둘이라는 늦은 나이에 영화제 신인상을 휩쓸고 있는 게 아니다.

응원과 위로, 희망의 메시지

 <찬실이는 복도 많지>라는 작품이 결국 말하고자 하는 바는 '찬실'처럼 꿈을 향해 열심히 달리기만 했던 사람들에게 전하는 응원과 위로다. 사실 찬실의 상황은 현실적으로 매우 착잡하다. 마흔이라는 어중간한 나이에 일자리를 잃었고, 다시 불러주는 곳은 없고, 열심히 일만 하며 살았는데 돈도 집도 없고, 십여 년 세월을 바친 꿈에 대한 회의만 남아있을 뿐이다.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찬실은 씩씩하게 다시 일어서는데, 이 전개가 여간 희망적인 게 아니다. 심지어 다시 일어서는 원동력이 자신의 정체성 자체를 의심하게 하며 오랜 세월 고생을 바친 '영화'라는 것은 결국 벼랑 끝까지 몰린 상황에서도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이 작품은 꿈이라는 목표를 향해 한방향만 보고 달려온 사람들에게 꿈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일종의 부스터를 제공한다. 지나칠 정도로 희망적이긴 하지만, 누구보다 희망이 필요한 세대가 아닌가. 찬실이처럼 힘든 우리도 주변을 돌아보면, 주변 인물들이 가져다주는 작은 복을 느낄 수 있기에 거기서 힘을 얻고 다시 일어서라고 응원의 목소리를 전한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 다시 일어설 우리 모두 복이 많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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