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opofilm Feb 23. 2021

[영화 리뷰] 러덜리스 (2014)

아들에게 바치는 뒤늦은 사랑노래 (빌리 크루덥/안톤 옐친/음악영화)

방류된 인생, 찾아온 구원의 음악

 잘 나가던 광고기획자 '샘(빌리 크루덥)'은 대학교 캠퍼스 총격 사건으로 아들을 잃은 충격으로 페인이 되어 요트에서 생활하게 된다. 사건을 잊은 채 페인트칠 노동자로 일하며 무기력한 삶을 살고 있던 와중 아들이 죽기 전에 썼던 음악들을 전해받게 되고, 그 음악들에 매료된 샘은 우연히 클럽에서 아들이 쓴 곡을 공연하게 된다. 뮤지션을 꿈꾸던 '쿠엔틴(안톤 옐친)'은 샘의 노래에 반해 함께 공연할 것을 끈질기게 구애하고, 늘 거절로 응수하던 샘도 클럽에서 한 곡씩 공연하는 것을 시작으로 밴드의 일원이 된다.

 아들이 써 놓았던 음악들에 대한 반응은 나름 폭발적이었고, 오합지졸 같았던 밴드의 인기 또한 날이 갈수록 높아진다. 더불어 미친 사람처럼 망가진 인생을 살았던 샘의 일상에도 활력이 생겨난다. 하지만, 샘은 자신이 부른 노래들이 아들의 곡이라는 사실을 밴드 멤버들에게 밝히지 못했는데, 이 비밀이 탄로나면서 '러덜리스' 밴드의 질주는 순식간에 멈추게 된다.

"비긴 어게인"인 줄 알았는데...

 음악을 통해 성장하고, 치유하는 스토리일 것이라는 점에서 <비긴 어게인>을 떠올리고 극을 감상했다. 하지만, 겉으로만 감성적인 음악영화로 포장되었을 뿐 영화가 가진 의미의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영화 중반부를 넘어서서부터 알게 되었다. 극 초반 대학교 총기 테러 사건으로 인해 '샘'의 아들 '조쉬(마일즈 헤이저)'가 사망한 것에 대해서 자세하게 비춰주지 않는데, 이로 인해 관객 대부분은 조쉬가 피해자일 것이라 추측했을 것이다. 하지만, 극 중반부 샘이 아들의 묘지를 찾아간 장면에서 엄청난 반전이 등장하는데, 조쉬가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였다는 사실이다. 여기서부터 극을 감상하는 스탠스가 바뀌지 아니할 수 없다. 쿠엔틴을 포함한 밴드의 멤버들이 희망을 느끼고, 관객들이 열광한 음악이 살인자의 음악이라는 것을 알게 되니 그때부터 어딘가 모를 불편한 시선으로 장면들을 바라보게 된다. 즉, 단순히 음악을 통한 치유나 위로만을 얻어가기보다는 복합적인 생각을 유발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시선의 변화, 그들에 대한 이해

 그동안 범죄사건의 피해자나 가해자 자체의 입장에서 전개되는 영화들은 많았지만, 가해자의 가족의 시선에서 풀어진 영화는 많지 않은 것 같다. <러덜리스>는 특히나 테러 사건과 함께 죽음을 자처한 가해자의 남겨진 가족의 입장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샘은 아들이 살아있을 때, 부인과 이혼도 하고 일에만 몰두하면서 아들에게 큰 신경을 기울이진 못한 듯 하다. 그래서 뒤늦게 아들이 써 놓고 간 음악들을 노래하며 아들에 대해 조금씩 알아간다고 표현을 했는데, 사실 아들의 노래를 부를수록 극단의 상황에 아들이 내몰릴 때까지 자신은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다는 처절한 후회와 괴로움을 풀어낸 게 아닌가 싶다. 아무리 범죄자라도, 결국 아버지에겐 하나뿐인 아들이기에 불편하더라도 이해가 될 수밖에 없는 그 감정. 개인적으로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아 극에 공감하기 힘들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샘이 느끼는 아버지로서의 후회와 사랑까지 이해하지 못한 건 아니다.

나 개인의 공감능력 부재일까

 <러덜리스>의 대한 관객 감상평은 대체로 후한 편이다. 특히나 죽은 범죄자 아들을 둔 아버지 샘의 입장에 공감과 이해를 보내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하지만, 사회적 윤리와 관련된 복합적인 문제를 단순히 부성애와 음악으로 포장하려는 극의 전개 방식은 상당히 무성의한 연출이라고 본다. 극의 엔딩 장면에서 아들의 노래를 부르며 미처 해주지 못한 편지를 멜로디에 띄우는 샘의 모습은 분명 절절하다. 적어도 샘의 입장이 아예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니깐.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샘의 입장일 뿐 내가 만약 총기테러사건 피해자의 가족이었다면 그 노래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공연하고 다녔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했을 것 같다. 더군다나 샘에게는 함께 밴드를 하자고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던 쿠엔틴에 대한 배려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음악을 순수한 마음으로 가장 좋아했던 쿠엔틴에게는 사실을 미리 밝히는 게 마땅했다. 이해를 구하는 것은 좋지만, 다른 사람들은 가해자 가족의 입장까지 이해해 줄만큼 마음의 아량이 넓지 않다. 이해를 구하고 싶다면, 웬만하면 주변 사람들에게서 구하는 것으로 끝내자. 우리가 쉽게 수용해줄 수 있는 주제도, 감정도 아니다, 절대.

작가의 이전글 [영화 리뷰] 문신을 한 신부님 (2019)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