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우리 안의 sorry.. 전우조 파티원 구합니다.
다음날부터 약 일주일 간은 재미없지만 몸은 편한 ‘정신교육’이 이어졌다.
강당을 옮겨 다니며, 이런 저런 교육을 듣고 영상을 보는 것이 일과의 전부였다.
한 가지 어려움이 있었다면, 밥이 드럽게 맛 없었다는 점이다.
와.. 밥이 이렇게 맛 없어도 되는거냐..?
평소에도 꽤나 편식을 즐기는 이곳은 내게 더 없는 고문을 선사했다.
입에 풀칠만 할 수 있을 정도의 메인 반찬과 원가 절감형 국, 김치.
아직 자대배치 받기 전, 튜토리얼 기간이라서 밥도 이따구로 주는거 맞지..?
여튼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갔다.
정신교육 시간마다 교관과 소대장들이 돌아가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모두 스킵하고 딱 한 가지, 지금까지도 마음에 새기고 사는 ‘그것’만 다루고 넘어가려 한다.
신병교육대대 2중대(내가 속해있던 중대)의 중대장 연설 시간.
중대장은 굉장히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냥 붙이는 말이 아니라 진짜 이상했다.
본인에 대해 소개하면서, 자신이 ‘밀덕’이라고 했다.
밀덕이란, ‘밀리터리 덕후’의 줄임말로, 군대 관련 정보들에 빠삭하고 이런 저런 수집품을 모으는 그런 사람을 의미한다.
본인이 군인이면서 동시에 밀덕이라니 ㅋㅋㅋㅋㅋㅋㅋ;
이게 말로만 듣던 그 ‘덕업일치’란 것 아닐까..?
여튼 본인은 뭐 총기 모델명, 장갑차 모델명 등등 다 안다고 자랑했다.
거기까지는 별 생각 없이 그런가보다 하고 넘겼는데, 이후가 다소 충격적이었다.
본인의 집에 다양한 호신 무기들이 즐비하다는 내용이었다.
‘플라잉 나이프(던지는 단검)’를 모으는 취미가 있어, 해외 배송으로 다양한 모델을 모았으니 깝치지 말라고 했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뭐 이런 이상하고 유쾌한 사람이 있지ㅋㅋㅋ’ 싶으면서도 섬뜩하긴 했다.
잠시 자신의 소개를 마치고는, 자신이 해주고 싶은 말은 하나 뿐이라며 ‘신독’의 마음가짐을 설명했다.
신독이란, ‘대학’과 ‘중용’에 실린 개념 중 하나인데, 쉽게 설명하자면..
누가 보든 말든 올바른 행실을 유지하라는 말이었다.
남이 보지 않는다고 길가에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이 되지 말라는 쉬운 예시가 있다며 한동안 장황하게 ‘신독’에 대해 설명했다.
사실 나는 별 것 아닌 이 말들에 다소 충격을 받았다.
크리스천(개신교 기독교인)도 아니면서 이런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었다니..
기독교인이라면 당연히 ‘신’이 언제나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모든 행동과 생각까지도 조심해야 하는 것이 맞지만, 그냥 무교라고 주장하는 이 사람의 입에서 이런 말을 듣다니.
문득 반성도 좀 했던 것 같다.
그래. 내가 미안해.
군대 썰 자체에 집중하라는 당신의 목소리가 들린다.
오케이.
여튼 그렇게 일주일이 빠르게 흘러갔다.
그 시간에도 나를 괴롭히는 일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그건 바로… ‘불침번’과 ‘전우조’였다.
불침번은 아는데, 전우조는 뭘까?
전우조란, 어디를 다니던 최소한 2인1조로 다녀야 한다는, 훈련병들에게 부여된 가장 큰 ‘룰’이다.
단순히 생활관에서 몇 걸음 나가면 있는 정수기에 갈 때에도, 화장실에 갈 때에도.
이 망할 전우조는 ‘아.. 그런 게 있구나.’ 수준으로 생각할 쉬운 상대가 아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된다.
당신이 친구 한 명과 늘 수갑을 한쪽씩 차고 다녀야 한다고.
물을 마시고 싶으면 옆 사람을 툭툭치면서 씩 웃어야 한다.
“ㅎㅎ.. 물 마시러 가실래여?”
ㅋㅋㅋㅋㅋㅋ웃기지만 참혹한 현실이었다.
화장실에 갈 때에도 똑같다.
“ㅎㅎ…혹시 화장실 가시나여?”
ㅋㅋㅋㅋㅋㅋ근데 화장실은 더 웃긴 게 뭔 지 아는가.
가는 것 뿐만 아니라, 돌아오는 것도 함께해야 하기 때문에 큰 일을 보는 사람은 그런 사람끼리, 작은 일로 마칠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끼리 다니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끔 ‘파티원 구하기’에 난항을 겪기도 한다.
“혹시… 큰 일이세요, 작은 일이세요..?”
“저는 조금 거대한 일을 볼 것 같습니다.”
이 때가 중요하다.
상대의 표정을 살피며, 심리학개론 강의에서 우리 조가 발표했던 바로 그것, ‘미세 표정’을 빠르게 분석해야 했다.
표정이 살짝 좋지 않게 구겨진다면,
“아하하하하 큰 일은 급하지 않으시구나~ 다음에 같이가요~~”하며 다음 파티원을 구하러 빠르게 떠나야 한다.
물론, 모두에게 적용되는 룰이기에 어떤 일이든 전우조 파티원을 구하는 일은 대부분 30초 이내에 마무리되곤 한다.
가끔, 작은 일을 보러 가자면서 큰 일을 보러 들어가는 빌런 녀석들이 있었지만, 그럴 땐 짜증을 내면 안된다.
이녀석들도 나중에 내가 큰 일을 도모할 때, 파티원이 되어줄 소중한 길드원들이니 말이다.
밥을 먹고 돌아올 때에도, 샤워를 하러 갈 때에도, 세탁기에 갈 때에도…
물론 하루이틀이 지나고 난 뒤부터는 대략적인 ‘고정 파티원’이 생겨 있다.
나같은 경우는 바로 옆자리 훈련병인 ‘J군’과 고정 파티원 협정이 맺히게 되었다.
롤을 하는 사람이라면 빠르게 이해할 것이다. 이것은 마치 칼리스타의 계약과 같은 것이다.
대개 한 번 맺으면, 훈련소 생활을 마칠 때까지 지속되는 그런 무언의 계약과 같은 것이다.
이 관계에는 꽤 많은 배려와 희생이 필요하다.
꼭 내가 목마르지 않아도, J군이 목 마르다고 하면 당연하다는 듯이 일어나주어야 한다.
물론 반대의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화장실도 마찬가지이고.
뭐 여튼간에 J군도 꽤나 성격이 좋았고, 종교도 같았기에 여러모로 고정 파티원을 잘 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우조는 이쯤 얘기하고 넘어가자.
진짜 악몽은 불침번이었으니까.
불침번. 이녀석은 정말 유해한 녀석이다.
신병교육대대 따위에 대체 누가 쳐들어온다고 아주 열심히도 불침번을 세운다.
롯XX아 아르바이트 외에, 교대 근무라는 시스템을 처음 접해본 나로서는 참 당황스러운 순간이 많았다.
세 명씩 한 조를 이루어 교대하며, 약 한시간 반 정도씩 돌아가는 불침번 근무를 섰다.
이 시간이 얼마나 지루한 지 모를 것이다.
일과 시간에 배운 제식(뭐 차렷, 열중 쉬어를 포함한 것들)들을 연습하기도 하고, 가족과 친구들에게 수기 편지를 적기도 했다.
하도 시간이 지나지 않다 보니, 정말 이 시간 동안 약 3년치의 생각을 몰아서 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딱히 유익했는지 모르는 생각들이지만 당시에는 인생 계획을 끝장내두었다고 여겼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개 짬찌면서(짬찌=짬밥 찌끄랭이의 줄임말) 감히 복학 이후의 계획을 벌써 세우고 있었다니..ㅋㅋ;
하루는, 불침번 근무를 서는 도중, 너무 소름끼치는 비명을 듣고 화들짝 놀랐다.
건물 옆면의 테라스로 향하는 통 유리문은 자물쇠로 잠겨 있어서 열고 나가서 듣지는 못하기에, 최대한 문에 밀착해서 귀를 대고 소리를 들었다.
‘으아아악-’ 이라는 것 같기도 하고, ‘끼야아아-’같은 기괴한 소리같기도 했다.
찢어지는 듯한 발성이 어두컴컴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숲에서 들려오니 잠시 공포감이 들었다.
물론, 나야 안전한 곳에서 자물쇠 잠긴 건물에 있었고, 여차하면 부를 수 있는 근육몬 친구들 수백명이 코를 골며 자고 있는 요새에 있었기에 크게 무섭지는 않았지만, 꽤 소름끼치는 상황이었다.
당직사관에게 걸리면 욕을 뒤지게 먹는 상황이지만, 나는 소리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같은 층에서 불침번을 서고 있는 다른 두 명을 불렀다.
셋은 같이 귀를 대고 소름끼치는 소리를 감상했고, 결론은 3초 만에 나왔다.
강원도 출신의 구수-한 M군이 상황을 종결해버렸기 때문이다.
“이거 고라니 소리에요. 고라니 소리 직접 들어본 적 없으시구나 ㅋㅋㅋ”
뭐야.. 그런 거였어..? 싶었지만 정말 더이상 궁금하지 않다는 듯, 다시 자리를 뜨는 M군의 모습을 보니 ‘확신이 있나보다..’ 하고 생각했다.
여튼 그렇게 그 사건은 종결되었지만, 불침번을 서는 동안 별의 별 사람들을 보게 되었다.
모포를 뒤집어 쓰고 라이트펜(돌리면 불빛이 나는 군인용 펜)을 꺼내 여자친구에게 몇 시간 동안 편지를 쓰는 사람, 이가 부숴지도록 갈면서 자고있는 사람, 누워서 몇 시간째 가만히 눈만 똘망거리며 뜨고 있는 사람 등등..
적을지 말지 고민도 많이 했지만, 정말 입에 담을 수 없이 이상한 녀석들도 꽤 있었다.
에이, 걔들은 너무 저질이었으니까 적지 말아야겠다.
그렇게 밥도 맛 없고, 불침번으로 잠도 잘 못 드는 하루 하루를 보내며 어느덧 2주라는 시간이 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