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과생, 자동차부품산업 PM으로 살아남기
"맙소사, 문과생인데 어떻게 여기서 일해요?"
현재 자동차부품산업에서 PM(Project Manager)으로 일한지 3년차. 아무래도 프로젝트를 이끌고 가는 리더 역할을 하는 프로젝트 매니저를 하다보니, 문과생이라 밝히면 다들 놀라며 되묻는다. 문과생인데 어떻게 PM을 하고 있냐고. 허허 그러게요, 저도 어쩌다보니 이렇게 먹고 살고 있네요.
사실 첫 직장을 구할 때만하더라도 구체적으로 내가 원하는 산업이나 직군이 없었다. 학생 때 국제회의 기획사ㅡPCO(Professional Convention Organizer)산업 중 하나로, 국제회의, 전시회 등 전반적인 행사를 기획하는 곳ㅡ에 관심이 많아 아르바이트로 행사 보조 경험을 많이 해왔기 때문에, 기획 혹은 프로젝트 관리 업무를 해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은 갖고 있었다. 프로젝트 관리나 기획 직군 혹은 글로벌 역량을 필요로하는 해외영업이나 무역 직군에 주로 이력서를 제출했다. 그러다 마침내 나의 첫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된 업무가 바로 자동차부품산업의 개발팀 Project admin 업무였다.
자동차 산업에 대해선 잘 아는 게 없었다. 자동차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자동차 산업에 대한 지식도 전무했다. 그런 내가 자동차 부품업체에 들어오다니. 나조차도 민망하고 신기했지만, 입사 후 나중에 듣게 된 이야기로는 적극적인 태도와 영어 실력 등을 고려해 뽑혔다고 한다. 취준생의 우려와는 달리 면접 결과에 관련 산업 지식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는 게 놀라웠지만, 워낙 회사마다 면접관에 따라 다르니 '면접은 복불복'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 같다. 그렇게 나는 얼떨결에 자동차 부품 산업에서 Project Admin으로 일했다.
Project admin 업무는 회사 내 전체 프로젝트들의 일정을 조율하고, 고객의 창구로서 고객의 요구사항을 접수하면 사내 담당자에게 자료 작성을 요청하고 자동차 개발 프로세스 관련 문서들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회사마다 다르겠지만 그 회사에서는 설계/개발 부문의 차부장급이 신차종 프로젝트 PM을 겸직했고, 나는 PM을 보조하여 프로젝트 일정이나 문서들이 일정에 맞게 고객에 제출될 수 있도록 Push하는 역할을 맡았다. 완전 생소한 업무였다. 그랜저, 아반떼, i30와 같은 완성차 이름 대신 HG, HI, AD, PD와 같은 프로젝트명으로 부르는 것부터 시작해, 현대기아자동차에 납품하는 1차업체로서 자동차 부품개발 프로세스(PSO, Process Sign Off)에 맞는 문서들을 개발일정에 맞추어 제출될 수 있도록 체크해야하는 게 많았다. 거기다 금형, 설계, 공정, 개발 관련된 엔지니어링 용어들은 또 어찌나 많은지! 회의에 들어갈 때마다 분명 한국인들이 한국어로 이야기하는 건데도, 까막귀가 된 것처럼 하나도 못알아 들을 때가 많아 좌절할 때도 많았다. 첫 사회생활이기도 했고 익숙지 않은 전문용어들이기도 했지만, 분명 문과생으로서의 한계도 분명했다. 아는 건 없지만 열정은 넘치는 신입사원이었던 나는, 인터넷을 뒤져가며 자동차 품질 용어들을 찾아보고 현대기아자동차의 PSO 개발 프로세스의 전신이었던 GM의 APQP(사전부품품질관리프로세스, Advanced Product Quality Planning) 문서들을 찾아가며 혼자 어떻게든 업무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 같다.
그렇게 딱 2년이 넘어가니 많이들 찾아온다는 슬럼프가 내게도 찾아왔다. 어느 정도 업무에 적응하고 사람에 적응하고 회사에 적응하다보니, 이게 맞는 길인가 내가 여기서 안주하지 않고 더 나아가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하는 고민이 많았다. 퇴사를 결정했던 가장 큰 이유는 내가 더 발전하기 어려운 보수적인 환경이었기 때문이었다. 승진을 앞둔 시점에서 대리, 과장, 차장 까지 계속해서 승승장구 커리어를 쌓아가기 위해서는 내 직무에서의 커리어를 넓혀가는 게 중요했지만, 전 회사에서는 계속해서 프로젝트 지원 관리 업무와 더불어 내 밑으로 남자 후배들이 여럿 들어왔음에도 팀 내 홍일점 여직원으로서 팀 내 문서 관리까지 도맡아 해야했다. 남초 집단에서 얼마 없는 여직원으로 많은 배려를 받았지만, 커리어를 넓혀가는 측면에서는 분명 유리천장이 존재했다. 그래서 나는 결국 퇴사를 결심했고 1년 넘는 방황 끝에 다시 지금 직장으로 이직할 수 있게 되었다.
현 직장, 그러니까 나의 두번째 회사는 역시 자동차 전장부품 회사다. 문과생으로서 자동차 산업에서 살아남기가 얼마나 힘든지 뼈저리게 느꼈기에 다른 산업으로 눈을 돌려보기도 했지만, 그래도 짧은 2년이라는 시간동안 배운 게 그것뿐이라 또 다시 자동차부품업계 PM 업무로 일을 구하게 되었다. 이래서 첫 직장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내가 정말 하기 싫고 힘든 곳이라면 모를까. 그땐 그렇게 힘들어했으면서 막상 다시 이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는 그래도 내가 자신있게 아는 분야에서 다시 열심히 일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 그래도 다른 환경에서라면 또 다르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이번엔 Project admin이 아닌 정식 PM으로 일하게 됐다. 일정관리만 하던 예전과 달리, 이번엔 직접 프로젝트를 맡아 양산 일정에 맞춰 잘 끝마칠 수 있도록 리딩하는 역할로 책임감의 무게가 남다르다. 자리에 앉아 문서만 보며 프로젝트들을 관리하고 담당자에게 문서 작성을 푸시하던 예전과 달리, 이젠 직접 발로 뛰며 프로젝트 담당자들을 만나 협의하고 일정을 조율하는 일이 많다. 게다가 외장부품을 다뤘던 전 직장과 달리 전장부품을 생산하는 이곳에서는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분야 용어까지 섭렵해야 하고, 내수가 아닌 글로벌 시장에 더 특화된 회사다보니 새롭게 배우고 익혀야 하는 게 한두가지가 아니다. 다시 한번 이렇게 새로운 곳에 던져지니 제대로 열심히 해보고싶다는 열정이 샘솟는다. 역시 나는 열악한 조건에서 나를 더 다그치고 채찍질하는 성향임에 분명하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나의 최대 약점인 <문과 출신>이라는 건 그만큼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는 조건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저 꿀리지 말고 묵묵히 내 자리에서 내 할일을 열심히 해나가는 수밖에.
아직 PM 걸음마 단계지만 천천히 나의 성장과정들을 기록해나가고싶다. 이 분야에서 내가 커리어를 쌓기로 마음먹은 이상, 문과생이라는 걸림돌이 아니라 도움받기로 더 성장해 나갈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