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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린 Apr 21. 2016

언제나 '청춘'으로 사는 조르바 이야기

소설<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스키 / 더클래식


이번 독서모임 책으로 읽게 된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
책 제목은 굉장히 많이 들어보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어느 필독서 리스트에건 죽기 전에 꼭 읽어야하는 명작 중의 명작으로 항상 꼽히는 책이다.

나의 적극 추천으로 이번에 책을 읽게 되었다!

책을 읽기 시작하고나서 스터디 카톡방에 종종 '읽기 어렵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등의 투정들이 올라왔다. 사실 나도 책장을 한 장 넘기기가 어려웠다. 극적인 스토리 전개보다는, 서사적인 내용이 주가 되는 소설이어서 그런지 묘사도 많았다. 게다가 화자는 주인공 조르바가 아니라, 그를 지켜보는 조르바의 '보스'기 때문에, 화자의 입장에서 조르바와 함께 지내온 시간을 다루고 있다.


소설을 읽으면서 알게 된 건, 주인공 조르바가 실제 카잔차스키에게 영감을 주었던 실존 인물이었다는 사실이다. 카잔차스키는 65세가 넘는 나이에 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젊었을 때 만났던 '조르바'라는 사나이와의 만남을 회상하며 소설화 했다고 한다.


모든 것에 호탕하고 직설적이고 당당한 조르바. 하지만 난 어쩐지 조르바가 얄밉게 보였다. 조르바에게 여자가 굉장히 많이 등장하는데, 이때 여자들은 조르바에게 꽤 중요한 의미로 다가온다. 그러나 조르바는 여자를 '암컷'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남성우호주의적인 관점도 많이 보였다. 여느 리뷰들처럼 그를 존경의 눈길로 보기엔 눈쌀이 찌푸려지는 구절도 꽤 보였다. '대체 사람들은 왜 이 책이 좋다는 거지? 사람들이 이 책을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서 초반에는 조르바를 향해 종종 볼멘소리를 내며 책을 읽어나갔다.



화자 '나'는 젊은 지식인으로 책을 좋아하고 부처의 사상에 깊이 빠져있는 작가이다. 그런 그에게 '조르바'와의 만남은 '신세계'같은 신선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책에서 길을 찾으려고 하는 자와 순간에 최선을 다해 인생을 즐기는 자
조르바를 향한 화자의 부러움과 동경에 대한 눈빛이, 내게도 옮겨진 것 같았다. 

천연덕스럽고 철없는 늙은이로만 보기엔, 조르바는 항상 에너지 넘치고 인생을 즐길 줄 아는 남자였다.

사람들은 조르바를 '자유인', '초인'이라 불렀지만, 나는 조르바야말로 '청춘'이 아닐까 생각한다. 청춘은 나이와 상관없이, 항상 긍정적이고 밝은 에너지를 갖고, 미래를 꿈꿀 줄 아는 자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본다면 조르바는 청춘이 분명하다.

그럼 20대를 보내고 있는 나는, 과연 청춘인가? 청춘답게 인생을 즐기고 있는가? 
아무래도 당당하게 대답하기 어렵다. 그렇기에 조르바가 더 멋져보이는 이유다.


조르바의 인간적인 면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항상 당당하고 고민없어보이는 그였지만, 그도 두렵고 걱정많은 하나의 인간이었다. 호탕하게 리드하던 그가 이제는 보스인 '나'에게 위로를 받는 장면이다. 

조르바, 당신이 무슨 일을 해도 잘못될 리가 없어요. ... 
당신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조르바에요.
... 
당신은 그런 걱정하지 않고 그저 해나가기만 하면 돼요.


나는 행복했고 행복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행복하다고 느끼면서 행복을 의식하기란 쉽지 않다. 행복한 순간이 흘러간 뒤에야 그것을 돌아보면서 그것이 얼마나 행복했던가를 깨닫는 것이다. 그러나 그 크레타 해안에서 나는 행복했고 행복하다는 걸 실감했다.


모든 건 때가 있는 법 아니오? 지금 우리 앞에 필래프가 있으니 필래프만 생각하고 내일 우리 앞에 갈탄 광장이 있을 때 갈탄을 생각하면 되지요. 어정쩡하면 아무것도 못해요.

내가 가장 좋아했던 대목. 
'순간을 즐겨라' 같은 말보다 더 와닿는 대목이었다. 지금 자기 앞에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해라. 지금 주어진 환경에 최선을 다해라. 다른 건 생각하지 말아라. 이게 모두 같은 말이다.


공자가 말하기를 많은 사람이 자기보다 높은 곳에서
혹은 낮은 곳에서 복을 구한다.
그러나 복은 사람과 같은 높이에 있다.
모든 사람에겐 각자의 키에 맞는 행복이 있다.

책에서는 종종 '행복'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얼마전 읽었던 <행복이란 무엇인가>란 책이 떠올랐다. 행복은 각자에게 딱 적당한 만큼만 주어지는 걸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지금 자기가 위치한 그 자리에서 얻을 수 있는 행복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조르바는 바로 그걸 알고 있는 것 같다.

p.158
나는 침대에 엎드려 눈을 감았다. 마음이 심란해서 아무말도 하고싶지 않았다. 잠이 오지 않았다. 여태까지 나가 했던 행동들에 변명을 붙여야 할 것 같았다. 인생을 돌아보니 밋밋한 데다 모순이 가득하고 주저함이 진득하게 달라붙은 몽롱한 반생이었다. 바람을 만난 한 조각 구름처럼 끊임없이 흩어졌다 모이고, 모였다가 다시 모습을 바꾸어 백조가 되고, 개가 되고 악마가 되는가 하면, 전갈이 되고 원숭이가 되었다. 구름이란 영원히 날리면서 찢기는 존재, 영원히 바람과 무지개에 쫒겨 다니는 신세인 것이다.



p.174
나는 달빛 속에 앉은 조르바를 보면서 주위 세계에 어우러진 그 소박함과 단순함에 놀랐다. 여자, 빵, 물, 고기, 잠같은 모든 것이 유쾌하게 잦아들어 조르바가 된 것이 놀랐다. 나는 우주와 인간이 이렇게 다정히 서로 엮여있는 것을 처음 보았다.

그는 조르바가 하는 모든 것에 의미가 부여되어있다고 보았다. 우리가 하는 일상적인 것들을 조르바가 하면, 그만의 방식으로 특별해 보인다고 믿는 것이다.

나는 조르바 앞에서도 창피하거든요.
어찌 생각하시오? 나는 조르바 앞에서도 부끄럽다는 겁니다.

이 대목에서 아차 싶었다. 아담 스미스의 <내 안에서 나를 만드는 것들> 내용이 생각났다. 책에서 읽었던 '공정한 관찰자' 개념이 떠올랐다. 개개인의 마음속에 있는 '공정한 관찰자'가 객관적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올바른 삶이 무엇인지 도덕이 무엇인지에 대한 잣대 보여준다는 건데, 조르바는 조르바 내면에 '공정한 관찰자'가 있다는 걸까? 꼭 도덕적인 잣대를 위한 게 아니라 할지라도, 내면에 공정한 관찰자가 있다는건 본인 스스로 당당하고 떳떳한 삶을 살고자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세상엔 웃음이 흔하기도 합니다. 웃는다고 생각하니 우스워지네요. 사람에겐 바보같은 구석이 있기 마련인데 가장 큰 바보는 그런 바보짓을 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나는 자유를 원하는 자만이 인간이라고 생각하거든요.

p.322
그는 목이 메여 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나는 부끄러워 입을 다물었다. 진짜 사내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 조르바의 슬픔이 부러웠다. 뜨거운, 단단한 뼈를 가진 사나이는 슬플 때는 진짜 눈물이 뺨에 흐르고, 기쁠 때는 머리로 재는 법없이 순수하게 기뻐하는 법이다.

이 책에서 조르바를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바보짓을 할 줄 아는 사람. 현명하지 않은 게 아니라, 순수하게 자신이 추구하는 걸 할 줄 알고, 인생을 오롯이 즐길 줄 아는 것. 우리는 각자 '원하는 걸 하면서 사세요!'라고 하지만, 과연 원하는 것을 정말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각자 마음속에 원하는 걸, 꿈을 품고 살면서도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기는 생각보다 쉽지않다. 그런 면에서 볼때, 조르바는 참 쉬운 삶을 사는 것 같지만 조르바야말로 자유를 진정 즐길 줄 아는 사람인 것이다.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마음 속에 품고 있는 걸 직접 실천하는 사람이 요즘은 참 멋있게 보이더라.


이따금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게 인생이구나. 변화무쌍하고 마음대로 안되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것, 무자비한 게 인생이구나.


조르바는 마당으로 나갔다. 울고 싶지만 여자들 앞에서 우는게 부끄러웠던 모양이다. 그는 언젠가 내게 말했다. '우는 건 부끄러운게 아니에요. 남자 앞에서 운다면 말입니다. 남자들끼리는 통하는게 있잖아요?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여자 앞에서 남자는 늘 자기가 용맹하다는 걸 증명해야해요. 우리 남자가 여자 앞에서 눈물을 흘리면 이 가엾은 것들은 누굴 믿습니까? 끝장나는 거에요.'
조르바가 침묵했기 때문에 내 안에서는 영원하지만 부질없는 질문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내 가슴은 고뇌로 가득 찼다. 세계라는 게 무엇일까? 세상의 목적은 무엇이고 한순간을 사는 우리가 어떻게 해서 그 목적을 이룰 수 있을까? 조르바에 의하면, 인간이나 사물의 목적은 쾌락을 찾는 일이었다. 어떤 이는 영혼을 창조하는 일이라고 말하겠지만 따지고 보면 그 말도 똑같은 말이 되고 만다.
하지만 왜, 무슨 목적 때문에 그래야 하지? 육체가 사라진 다음에도 우리가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은 남는 걸까? 아무것도 남지 않는 다면 우리가 영원불멸을 원하는 것은 우리가 영원불멸하다는 사실에서 시작된 게 아니라 짧은 우리 인생에서 뭔가 영원불멸한 것을 섬기고 싶어하는 데서 시작된 건 아닐까?

부불리나가 죽고난 뒤, 조르바는 애써 부불리나를 잊은 척 '나'에게 그동안 상처를 많이 입고 견뎠기 때문에, 이 고통도 견딜 수 있다고 말한다. 또 이렇게 덧붙인다.
"새 길을 닦으려면 새 계획이 필요한 법입니다. 나는 어제 일어났던 일 따위는 다시 생각 안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도 미리 생각하지 않지요. 내게 중요한 건 바로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나는 자신에게 물어봅니다. '조르바, 지금 이 순간 자네는 뭐 하나?' '잠자고 있어' '그래 그럼 잘 자게.' '조르바 지금 뭐하나?' '여자에게 키스하고 있지' '그래,그럼 실컷 해보게. 이세상에는 아무것도 없네. 자네와 그 여자밖에 없으니 실컷 키스나 하게.'


어느 블로거의 리뷰를 보다가, 조르바를 'Carpe Diem'을 가장 잘 실천한 사람이라고 했다. 책을 중간쯤 읽으면서는 이해가 안갔는데, 과연 왜 조르바가 여태 모든 일에 그리 최선을 다했는지,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순간에 어떻게 그렇게 최선을 다할 수 있었는지 조금은 이해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책을 읽는 내내 조르바에 대한 삐딱한 나의 시선은, 책의 말미쯤 되면서는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 그 자체를 충실히 살아가는 조르바의 매력에 빠지기 시작했다. 책을 덮기 100페이지를 채 남겨놓기 전에서야 말이다!


그렇게 조르바를 알고 났다고 생각하니, 그의 캐릭터가 꽤 매력적으로 보였다. 사실 나는 그의 캐릭터가 오르탕스 부인(부불리나)를 만나면서 그의 남자다움과 책임감, 자유로움, 당당함 등 그의 매력이 한껏 발산되었다고 생각한다. 왕년엔 사랑받았지만, 지금은 주변에 조르바 말곤 아무도 없이 죽어가던 늙은 오르탕스 부인. 그녀를 가엾게 생각했던 건 오직 조르바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조르바와 '나'가 헤어지고 나서 서로 만나진 않았지만 편지로 서로의 안부를 주고 받았던 장면에서는, 정말이지 '역시 조르바답구나!' 라며 무릎을 탁 쳤다.

지난 일에 후회하거나 미련을 갖지 않고, 오롯이 현재에 집중하여 인생을 즐기며 살던 조르바. 그는 마지막까지 침대에서 힘없이 죽어가지 않고, 창가에 꼿꼿이 서서 자유를 만끽하며 죽었다. 참 조르바다운 죽음이다.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책을 덮으면서 다시 처음으로 향한다. 이 책을 대강 읽으면서 투덜거린 시간이 많아서인지, 아쉬움이 더 크다. 다시 한번 이 책을 읽는다면 조르바를 향한 나의 시선도 많이 부드러워지지 않을까? 또 책 초반에서부터 조르바의 생각이나 가치관을 좀더 빨리 알아챘더라면, 내가 더 많이 배울 수 있지 않았을까?

꼭 한번 다시 읽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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