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늘 설렌다. 별 것 아닌 일에도 너그러워지고 긍정적인 기분을 갖게 해주는 시작의 강점을 최대한 즐기고 싶다. 아침에 눈을 뜨니 창 밖에 비가 내린다. 11월의 비는 가을을 더 빨리 다가오게 만들 것이 분명하다. 가을이 우리 곁에 오래 머물길 바라면서도 익어가는 가을색을 보고 싶어 하는 묘한 양가감정을 이기적 이게도 끌어당겨본다.
모닝루틴으로 커피포트에 물을 끓인다.
기다리는 동안 원두를 그라인더에 넣고 곱게 갈아둔다. 잠시 후 만나게 될 뜨거움과의 조우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 본다. 오늘은 어떤 향기로 나를 유혹할까. 이미 내 마음은 유혹에 넘어갈 준비를 완전히 마쳤다. 엄청난 자극이 아니어도 좋다. 나의 잠들어있는 감각의 미세한 부분을 살짝만 건드려줘도 난 너의 맛에 그리고 향에 완전한 포로가 될 거란 것을 잊지 말고 가장 순순한 맛을 나에게 전해주렴. 거창한 아침 준비는 아니지만 따뜻한 온기를 머금은 빵 한 조각, 뽀얀 속살을 수줍게 드러낸 사과 한쪽, 그리고 온몸의 감각을 흔들어 깨워줄 커피 한 잔이면 세상 그 어떤 조식도 부럽지가 않다. 우리의 욕망은 채워서 만족을 얻기보다는 절제해서 만족을 얻는 것이 더 행복에 가깝지 않을까. 가장 스토익한 발상이다.
미각이 가장 잘 느껴지는 온도는 펄펄 끓는 뜨거움이 아니다. 음식을 자주 요리해 본 사람들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뜨거울 때는 입안에 넣었을 때 그 뜨거움으로 인해 식재료 본연의 맛과 조화를 잘 못 느끼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음식뿐만 아니라 차나 커피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차를 좋아하시는 분들을 보면 적당하게 식힌 물로 차를 우려내신다. 내가 아침마다 내려 마시는 커피도 그렇다. 드립을 하면서도 적당하게 온도가 내려가지만 커피잔으로 옮기로 나서도 잠시 향을 먼저 마시고 그리고 입으로 마시는 순서가 가장 행복한 시음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가장 뜨거운 온도에서 서서히 내려오는 온도 그 어느 지점이 주는 편안함과 안정감, 행복감은 기다림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기다림!!
우리들의 삶 속에도 무수한 기다림의 가치들이 곳곳에 숨어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공동체를 벗어나 나 홀로 살 수는 없다. 그래서 사람과의 관계는 늘 조심스럽고 주의를 기울여야만 서로가 불편해지지 않는다. 간혹 첫 만남부터 지나치게 호의를 보이든지 가까워지려고 선을 넘는 경우 친근함보다는 경계심으로 한 걸음 물러서게 된다. 오랜 시간을 만나왔다고 모두가 편한 사이가 되지는 않는다. 사람은 잘해주는 사람보다 불편하지 않게 배려하는 사람들과 더 지속적 관계가 유지된다. 즉, 잘해주려 애쓰기보다는 상대가 불편하지 않도록 배려하고 기다려주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나이가 들수록 배우자에 대한 생각도 어김없이 변해간다. 열병처럼 끓어오르던 사랑의 감정이 둘을 끌어당겨 결혼이라는 제도 속에서 영원을 약속하며 자발적 구속을 원했다. 하지만 그 사랑은 영원할 수가 없다. 뜨겁던 사랑도 세월 속에서 서서히 식어가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다. 그것을 불편해하고 왜 처음과 같지 않느냐고 불평할 이유는 전혀 없다.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음을 이해하면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것은 사랑의 온도가 식어가면서 전해지는 편안함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안온하고 평화롭고 지속적이다. 그래서 살다 보면 그 식어가는 사랑이 더 소중하고 더 큰 진실성이 느껴질 때 뭉클하기까지 한 감동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사랑은 식어갈 때 진실성이 드러나는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 그 사랑을 온전히 즐기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회생활 속 인간관계도, 가장 가까운 가족 간의 관계에서도 우리는 서서히 식어갈 때까지 그들을 묵묵히 지켜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따뜻한 온기를 머금고 오래오래 같이 있고 싶은 사람이 되는 것, 우리가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혜의 기다림!!
책을 읽고 사유하는 삶을 살겠다고 고전을 선택하고 몇 년 동안 힘든 발걸음을 책 속으로 옮겼다. 처음은 몹시 뜨거웠다. 많이 알고 싶었다. 지혜에 성큼 다가가고 싶었다. 4년을 몰입해서 책을 읽으며 깨달았다. 하루아침에 지혜를 끌어안을 수 없다는 당연한 진리를 뜨거움이 적당히 식어가며 또렷하게 느껴졌다. 스스로 깨닫고 나만의 지혜를 만들어가는 데는 당연히 시간 속에서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그 또한 내가 부딪치고 열망해 보고서야 깨닫게 되다니.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나에겐 이 또한 훌륭한 경험이 되었다. 이제는 적당한 거리에서 적당한 온도를 유지하며 따뜻하게 나의 지성을 데워나가리라 마음먹었다.
지성은 신이 혼 안에 켜둔 등불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지성의 등불은 모닥불처럼 커다란 불꽃으로 타오르는 것이 아니다. 등불처럼 작지만 오래오래 공간을 밝혀주는 것이다.
기다림!!
감각의 세계에서도, 인간관계 속에서도, 내면에서도 우리는 늘 기다리는 태도로 조금은 느긋하게 조금은 편안하게 대상을 대하고 연구할 필요가 있다. 내 삶은 더 이상 불꽃처럼 타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꺼지지도 않을 것이다. 그 속에서 내가 찾고자 하는 관계, 진리, 가능성을 더 많이 탐색하고 진중하게 그 길을 걸아갈 것이다.
커피 한 잔의 식어감 속에서 느끼는 나만의 삶의 철학을 비 오는 11월의 아침에 적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