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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옐옐 Jul 19. 2017

억양이 다른 이들이 소통하는 방식

'쏜애플'의 '서울'을 듣고

서울을 좋아한다. 내가 살아가는 이 도시에 아주 큰 애착을 가지고 있다.


황현산 선생님의 '밤이 선생이다'에는 무척 아름다운 서문이 실려있는데, 내가 서울을 좋아하는 이유를 그의 글을 빌어 생각해보자면 이렇다.


존경받고 사랑받아야 할 내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사람들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사는 세상을 그리워했다. 이 그리움 속에서 나는 나를 길러준 이 강산을 사랑하였다. 도시와 마을을 사랑하였고 밤하늘과 골목길을 사랑하였으며, 모든 생명이 어우러져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꿈을 꾸었다.


서울에 시간을 묻고 자랐으니 이곳이 나를 길러준 강산인 셈이다. 나를 기른 땅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 땅에서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 나의 언어로 소통했다. 좋아하는 노래를 듣고 좋아하는 문장에 밑줄을 치며 실컷 감흥에 젖어 되지도 않는 말을 떠들었다. 그러면서 세상 어딜 가도 이 도시만큼 나를 나로 있게 하는 곳은 없을 거라 확신했다.  

곳곳에 지나간 날들의 웃음과 눈물이 그렁그렁 묻어 어느 한 구석을 지나도 각기 다른 시점의 내가 고개를 내미는 이 도시에서,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길 바랐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서울에서의 모든 시간이 마냥 행복한 것은 아니어서 가끔은 이 도시의 삭막함에 숨이 막힐 때가 있다. 서울에서 외로울 땐 조금 더 많이 참담하다. 내가 좋아하는 장소에서조차 버틸 수 없다면 이 세상 어디에 발 디딜 수 있을까 하는 막막한 두려움이 든다.


요즘은 슬프게도 마냥 행복한 순간보단 서울살이가 두려워지는 순간이 더 많은 것 같다. 지금의 서울은 축적되는 것 없이 그냥 흘러가고 과거의 나를 보며 그때는 참 좋았지 할 뿐이다. 이렇게 시간이 더 지나고 좋았던 순간들로부터 멀어지다 보면 서울이 내 강산이 아니게 될까, 그럼 난 서울에서 더 이상 자랄 수 없게 될까 생각하면 익숙한 서울 공기가 어쩐지 무겁게 느껴진다.  


그런 두려움이 찾아올 때면 나가서 걷는다.

서울 변두리 우리 동네에는 아파트 단지 사이로 난 나무가 우거진 공원이 있는데 노래를 들으며 그 공원을 걷는 것이다. 힘든 하루를 보내고 돌아온 날이면 아무 생각이 들지 않도록 동그라미 길을 몇 바퀴고 빙빙 돌았다. 무념무상으로 그냥 걷다 보면 노래는 그저 귓가를 스쳐 지나갈 뿐이었는데, 많은 노래들 중 쏜애플의 서울은 유독 스쳐 지나가지 않고 붙들려있었다.


이 노래는 처음 나왔을 때부터 좋아했음에도 그 날은 유독 "너와 난 잠투정을 부리는 억양이 달라서 농담밖에 할 게 없었네" 하는 가사가 뇌리에 박혀 떠나질 않았다.


너와 난 잠투정을
부리는 억양이 달라서
농담밖에 할 게 없었네

노래가 되지 못했던
이름들이 나뒹구는
거리에 내 몫은 없었네

우리는 결국 한 번도
서로 체온을 나누며
인사를 한 적이 없었네

우린 함께 울지 못하고
서로 미워하는 법만 배우다
아무 데도 가지 못 한 채로
이 도시에 갇혀버렸네

쏜애플 <서울>


서울이라는 노래를 만들고 서울병이라는 앨범을 낸 이들도 분명 이 도시에 어떤 종류의 애착을 가졌을 것이다.

하지만 잠투정을 부리는 억양이 달라서 농담밖에 나누지 못했다 말한다. 체온을 나누며 인사한 적 없다 말한다. 농담으로 밖에 소통할 수 없는 이들은 얼마나 외로울까. 체온조차 나누지 못하는 인사는 얼마나 차가울까.


가닿지 않는 말들과 목적지 없는 발걸음에 서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노래를 만든 이는 이 땅에서 얼마나 지독한 외로움을 느꼈을까 생각하니 서글퍼졌다.


그리고 부끄럽게도 타인의 외로움을 빌어 서울에서 살아감의 연대를 느꼈다. 누군가의 고통을 통해 위안을 얻고야 말았다. 이 땅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흔들리는 사람이 나밖에 없는 것 같을 때, 다른 이도 함께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이 위로가 될 때가 있다.


그래서 아마도 우리는 다시 일어나 길을 나설 용기를 얻는지도 모른다. 그 길이 지도에 있든 없든 묵묵히 걸을 뿐이다. 혼자인 것 같을 때도, 다른 누군가도 혼자라는 사실에 얄팍한 위안을 얻으며.


하지만 외로움으로 외로움을 달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나는 우리가 끝끝내 이 땅에서 소통했으면 좋겠다. 나눌 수 있는 게 농담밖에 없다면 그 농담에 크게 웃을 수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사랑하는 이 강산 이 도시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조금 덜 외롭고 조금 더 행복하였으면 좋겠다.


결국 필요한 건 억양이 다른 우리가 서로의 억양을 배우며 어떻게든 대화하는 방법을 찾으려는 노력일지도 모르겠다.






쏜애플,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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