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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란 Feb 01. 2024

예비고1 오리엔테이션 5탄

내 수학점수는 누구의 탓일까

심리학에 <귀인이론>이라는 것이 있어. 어떤 일이 발생했을 때 그 원'인'을 어디에 '귀'속 시키냐에 따라 이후 우리가 취해야 할 행동이 달라진다는 이론이지. 너희들에게 1학년 1학기를 시뮬레이션시키다가, 중간고사 말아먹은 그 타이밍에서 주저앉는 아이들과 다시 일어서는 아이들의 차이를 설명해야 할 것 같아서 이 얘기를 꺼내게 되었어.


고모가 첫 1학년 담임 때 중간고사 후 무너지는 아이들을 보며 '지금부터 하면 만회할 수 있어'라고 얘기했지만 아이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라. 그 이후의 순차적인 양상은 먼저 얘기한 그대로야.

수행평가로 허덕이다 곧바로 찾아온 기말고사를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더 말아 드시고, 절망감과 조급함으로 한 달이 채 안 되는 여름방학 동안 2학기 준비를 한다고 이 학원 저 학원 더운데 돌아다니다, 쉰 것도 아니고 공부한 것도 아닌 상태로 학교로 돌아온 아이들의 표정은 더 이상 나아갈 힘없는 패잔병들의 표정이었지.


아이들을 심기일전 일으켜 세우려고 상담을 하며 1학기 '실패'(아~~~ 실패가 아닌데)의 원인을 찾아보자고 하니 너무나 많은 아이들 입에서 나온 말이 이거야. '이게 다 선행을 안 했기 때문이에요.'

동네 언니 오빠들이 선행 최대한 당기고 오지 않으면 고등에서 망한다고 했는데 어리석은 자신이 그걸 못했다는 것. 이렇게 결론을 내버리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지. 그래서 생각난 것이 <귀인이론>이었어.


나의 고등학교 첫 학기 수학성적이 기대보다 못하다. 그때 생각할 수 있는 원인에는 이런 것들이 있을 거야.


1. 머리 탓. 내가 수학 머리가 없다. 엄마도 아빠도 수학을 못했고 그래도 학원 열심히 다니며 여태 버텼는데 그건 딱 중학교 때까지 유효한 듯하다. 수학도 재능이라더니 고등학교 수학은 결국 수학머리가 없는 내가 넘을 수 없는 산이었다.


2. 선행이 결국 답이구나. 미리 공부를 해가지고 고등학교에 들어왔어야 했다. 애초에 고등학교 수학은 학기 중에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어마무시한 공부량이 필요한데 중3 2학기 기말(1, 2학년보다 한 달 정도 먼저 치르므로 11월 중순이다) 끝나고부터 6개월을 준비한 중간고사도 그 모양이었으니 두 달 후 기말은 당연히 더 못 보지. 1학년 2학기는 여름방학 한 달 공부한 게 다인데 이제 2학기는 보나 마나이고, 2학년은? 헐~~ 내 인생은 이제 끝난 거다.


3. 내 공부법에 문제가 있었다. 기본유형까지는 열심히 반복연습했지만 그보다 높은 수준의 응용문제가 이렇게 많이 나올 줄은 몰랐다. 응용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4. 충분한 공부시간을 확보하지 못했다. 버려지는 자투리 시간이 너무 많고 학원 수업받고 숙제하기에 급급하지 더 이상의 내 공부시간이 없다.


대표적인 귀인의 예를 들어봤는데 앞의 둘과 뒤의 둘의 차이가 보이니?

1번과 2번은 '유전자'나 '지나가버린 시간' 등 내 밖에서 그 원인을 찾았지. 부모를 바꿀 수도 없고 유전자를 이식해 올 수도 없고, 시간을 되돌려 중1이 되어 고3까지 선행을 쫙 다시 할 수도 없어.  

3번과 4번은 귀속된 원인을 나에게서 찾았어. 내가 태도와 방법을 수정하면 되는 것이므로 일단 수정된 방법으로 다시 시도해 보며 그 분석이 맞았는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더 있는 건지 끊임없이 진단과 처방을 해나갈 수 있다는 특징이 있지.


너의 수학성적은 누구의 탓일까? 1, 2, 3, 4가 모두 원인일 수 있어. 그런데 앞의 둘은 지금 이 상황에서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귀인이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거기에서 이유를 찾아.


입시를 다 끝낸 사람들은, 선행은 하면 좋겠지만 선행을 했다고 좋은 성적이 보장되는 것은 절대로 아니라면서, 선행이 제대로 안 되어 있었지만 성공한 사례들을 막 얘기해 주거든.

반면, 선행을 해야 한다고 조언해 주던 동네 형 누나들은 다 아직 입시가 안 끝난 고등학생들일 거야. 아니면 입시의 결과가 참패인 사람들이거나.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느낌이 오니?

왜 아무 도움이 안 되는데도 자기의 노력으로 바꾸지 못하는 유전자나 지나가버린 시간에 귀인을 할까. 맞아, 그래야 내가 해야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지거든.




일반고에 오면 좋은 이유, 여기서 하나 얘기하자.

시행착오를 겪을 수 있는 여유가 있다는 것. 진짜 선행 빠방하게 하고 온 아이들이 1, 2, 3등급을 꽉 채우고 있는 학교에서 네가 이런 상황에 봉착해서 공부법을 이것저것 시도해 보고 더 시간을 투자해 공부를 해도 3등급 안으로 들어가는 게 가능할까? 그런데 일반고에서는 그게 가능해. 실제로 고모는 4-3-2-1등급으로 수학 점수를 올린 친구도 봤고, 선행 없이 매 학기 전 방학 때 예습만으로 1, 2등급을 오가던 친구도 봤어.


올해 고모네 학교에서 카이스트 이른 전형으로 붙은 친구가 있는데 수학 과학이 모두 1등급이었거든. 수학과학 영재인거지. 근데 그 애 수학성적표에 1학년 1학기 3등급이 하나 있더라고. 궁금해서 불러다 물어봤다니까, 이건 뭐냐고. 그 애 대답이 '중학교 때처럼 공부하면 되는 줄 알고 공부했더니 3이 떠서 2학기때부터는 두배로 공부해서 1 만들었'대. 뭐 대단한 사연이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다였어.


좀 미안한 얘기이지만 일반고는 2학년쯤 올라가면 수학에서 손을 놓는 친구가 절반이야. 내가 공부를 놓지만 않으면 5등급 이상은 한다는 거야. 학교에 따라서는 '책만 펴만 3등급'이라고 하는 일반고도 꽤 있어.

1등급 하나, 2등급 둘, 3등급 셋이면 평균 내신 2.3이야. 서울 중위권 대학은 다 넣어볼 수 있어. 제주대도 의대 빼고는 다 합격일걸? 1등급 둘, 2등급 셋, 3등급 하나면 평균 1.8이야. 연고대도 다 넣어볼 수 있는 성적이지.


조슈아 형 고등학교 들어갈 때 형이랑 같이 세운 전략이 뭔지 아니? 일반고 가서 3등급만 하자. 제일 자신 없는 수학, 처음부터 3등급 아니어도 되니까 포기하지만 않으면 나중에는 다른 아이들이 포기해 줘서 자동 3등급 안에 들 거다. 다른 과목은 열심히 하면 간혹 1등급도 나오는 게 있을 거고 평균 2등급만 해도 되니 죽어라 해보자.

되더라. 1학기때 수학 4등급이었는데 2학기때는 3등급으로 올리더라고.


형 성적을 여기서 막 공개해도 되냐고? 조슈아 형은 그게 자랑거리야. 심지어 내가 '4등급을 3등급으로'라고 얘기하면 아니라고 정정시킨다. 중간고사 때 5등급이었는데 기말 때 올려서 4등급 만들었고 2학기때는 3등급 중반점수를 받았다고. 2학년때는 2등급까지 올리고, 졸업 전에 꼭 1등급을 보여주겠다고.

대단한 자신감과 투지이지? 선행 1도 안 한 분이십니다.


요즘 형은 아침 8시부터 밤 10시까지 앉아 공부하는 독서실에 다녀.(물론 중간에 학원도 다녀오고 밥먹고 산책도 하고..)

힘들지 않냐고 물으면 '전 중학교 때 공부를 하나도 안 해서 지금 좀 해도 돼요. 그리고 1학년 수학은 계산도 많고 스피드도 요구해서 힘들었는데 수1, 수2로 가니 계산보다 수학적 통찰이 더 필요한 내용이라 도리어 더 재미있어요. 전 고등학교가 더 맞는 거 같아요' 그러시더라고. 훌륭하지 않니?


얘들아, 너희를 믿어.

솔직히 니들이 거기 시골에서 너무 놀아서 그렇지 엄마 아빠 유전자인데 공부 머리가 없을 리가 없다. 너희가 제대로 해보지 않아 너희의 가능성을 제대로 확인해 본 적도 없고 공부 재미를 제대로 느껴보지 못했을 수도 있어. 전력을 다해 자신의 능력을 시험해 보고 성취감을 느껴보기에 공부만큼 좋은 것도 없고, 청소년기에 그걸 경험하면 세상 어디에 나가서도 너희는 무엇이든 도전할 수 있는 자기 확신을 갖게 될 거야.


고모가 응원할게,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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