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 연산에 관하여
수학은, 개념을 배운(學) 후 그 의미를 이해하고 적용하며 원리를 익히는(習) 충분한 시간을 필요로 하는 과목이다. 학(學)은 학교에서 이루어지지만 습(習)은 방과후에 이루어진다. 요즘은 대부분의 아이들이 습의 과정에서 부모가 아닌 사교육기관의 도움을 받는다. 그럴지라도 아이의 習이 단계단계 잘 이루어지고 있는지 부모가 세심히 관찰하는 것은 꼭 필요하다.
방과후에 우리는 무엇을 챙겨야할까. 이것저것 다 하면 좋겠지만 우리에게는 시간도 금전도 에너지도 한정되어 있으므로 순간순간 선택과 포기를 해야한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각 두 살 터울로 세 아이를 동시에 돌보기에는 아무리 전업이어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그레이스가 초등일때는 책읽기와 영어에만 집중했다. 초등수학은 그렇게 어렵지 않으니 그레이스 정도면 수업만 들어도 쫓아갈 수 있으려니 하고 신경을 못 썼다.
그런데 3학년 봄에 그레이스가 '엄마 내가 우리반에서 계산이 제일 느려요'라고 얘기해서 깜짝 놀란 일이 있다.
우리나라 수학 교육과정은 나선형 구조이다. 수학의 각 영역을 일년단위로 순회하는 식이다.
예를 들면 2학년 봄에 연산을 배우고 여름에 도형을 배우고 가을에 자료의 정리를 배운 후 3학년 봄에 더 어려운 연산을 배우고 여름에는 더 어려운 도형을 배우고 가을에는 더 어려운 자료의 정리를 배우는 식이다. 그러니 2학년 봄에 구구단 단원에서 구구단을 완벽히 외우던 아이도 여름과 가을을 지나며 계산을 할 일이 없으니 3학년 봄이 되면 외웠던 구구단마저 까먹을 수 있다. 그래서 초등때는 일년 내내 연산 연습만은 조금씩 계속 해줘야했던 것이다.
생각해보니 그 옛날 나도 눈**수학을 했었다. 후에 서울대 물리학과에 간 수학 잘하던 남학생 엄마가 학부모 모임에서 준 정보덕에 나의 모친도 초6이던 내게 눈**수학 선생님을 불러주었고, 1년 남짓 재미있게 하며 수감각을 익히고 식을 조작하는 훈련을 통해 계산속도가 많이 빨라져서 이후에는 계산때문에 곤란을 느끼는 일은 없었던 것 같다. 반면, 아인슈타인처럼 이론물리를 하고 싶었으나 수학계산이 자꾸 틀려 포기하고 실험물리로 방향을 튼 아픈 기억을 가진 남편은 말이 나오자마자 애들 연산 훈련은 꼭 시키라며 신신당부를 했다.
짧은 육아 역사를 통해 그때쯤 터득한것이 학원은 아이가 간절히 원할때 보내야지 엄마가 먼저 제안하거나 강요해서 다니기 시작하면 보내는 내내 힘들고 결국 끝도 안 좋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연산 학습에 대한 세가지 선택지를 아이에게 제시했다.
1. 기*수학 - 하루에 한 장씩 뜯어 푸는 연산 연습 문제집. 서점에서 구입가능. 엄마랑 분량을 정해 매일 꾸준히 푼다.
2. 구*수학 or 눈**수학 - 선생님이 집에 오셔서 내용을 설명해 주시고 일주일치 문제지를 놓고 가시면 매일 분량만큼 풀어두었다가 선생님께 검사받는 방문학습지.
3. 눈**학습센터 - 집에서 매일 아이들을 자리에 앉혀서 학습지를 풀게 시키는 것도 여러 이유로 힘든 부모를 위해 학교 앞에 센터를 만들어놓아 아이들이 하교길에 들러 학습지를 풀고 검사받고 집에 가게 하는 시스템.
곰곰히 생각하던 그레이스는 기*수학은 밀릴 것 같고 눈**학습센터는 학원을 하나 더 다니는 기분일 것 같아 싫다고 했다. 자신에게는 일주일에 한번 선생님이 오시는 것이 가장 적당한 수준의 구속력일 것 같다며 2번을 선택했다. 늦기 전에 시작해서 다행이었고 덕분에 두 살 어린 조슈아는 1학년때 연산문제집을 시작하는 특혜를 누렸다. 물론 본인은 내켜하지 않았지만...
가정학습지를 하며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 집으로 오는 학습지 선생님이 수학 전문가가 아니다보니 학교 진도보다 앞서 진도가 나가게 되었을때 개념설명을 제대로 해주지 않고 덮어놓고 외우라고 하는 걸 목격했고, '아~~ 저러면 안 되는데~~' 가슴이 미어졌던 기억이 있다. 초등수학은 내용의 전문성 때문이 아니라 대상의 특수성 때문에라도 전문가인 초등 선생님이 가르치는게 맞다. '엄마가 설명하면 이해가 안 되고 우리 선생님이 설명해주셔야 이해가 된다'고 해서 나는 애초부터 아이들의 초등수학은 가르치지 않았다.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 초등 수학은 초등 선생님께.
아무튼 그레이스는 그후 1년반정도 연산학습지를 꾸준히 했고, 반복적 계산이 필요한 시기에 큰 도움을 얻었다. 그러나 자슈아는 시간에 쫓기는 기계적 연습을 너무 힘들어하여 반년정도 하다가 그만두었다. 아무래도 수학을 처음 시작하는 1, 2학년 아이들에게는, 간단한 보드게임에서 두개의 주사위를 굴리거나 할리갈리 같은 스피드와 긴장을 즐기는 게임을 통해 두 수의 합을 연습시키는 편이 훨씬 스트레스도 적고 자연스러운 훈련이 되는 것 같고 좋았다.
그렇게 그레이스는 '반에서 계산이 가장 느린' 아이라는 느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자신이 친구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능력이 떨어진다는 느낌 에서 비롯된 좌절감이 수학을 포기하는 수포자들의 동기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점을 생각해봤을때, 적기에 필요한 처방을 내리고 조치하는 민감함이 우리 부모에게는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어느 학원, 어느 시스템에 맡겼다고 안도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므로 힘들더라도 주양육자가 틈틈히 신경써주면 참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