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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란 Feb 02. 2024

그레이스의 사교육 이야기 (2)

정상인 아이를 바보로 만드는 서두름.

먼저 얘기해 둘 것이, 나는 결혼과 동시에 휴직을 하여 아이들이 6학년, 4학년, 2학년이 되던 해 복직하기까지 14년을 휴직을 했다. 때문에 그 이전에는 전업 주부였고 그 이후에는 워킹맘이었다. 아이들의 사교육 의존도도 그 기점으로 완전히 결을 달리한다. 다만 끝까지 수학학원을 못 보낸 아이는 그레이스가 유일하다. 어릴 때부터 엄마의 신념을 너무 견고히 이식받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수학은 혼자 하는 공부이다.


아, 유.아.수.학.

공부역사를 기억해 내다 방금 잊었던 그 단어가 생각났다. 나도 유아수학(취학 전 수학)에 관심을 기울였던 엄마이다. 가베 같은 교구나 놀이수학 센터도 기웃거렸고 6, 7세용 2년 커리의 유아수학 교재도 구입했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았던 전북 완주군 봉동읍 둔산리의 한 사립 유치원에서의 경험으로 엄마의 서두름이 정상인 아이를 바보로 만들 수 있음을 깨닫고, '할 수만 있으면 최대한 빨리' 가르친다는 선행의 정신을 멀리하고 '할 수만 있으면 최대한 제 때에' 한다는 원칙을 세우게 되었다.


때는 바야흐로 2010년 9월, 남편이 완주의 한 산자락에 위치한 연구소로 이직을 하며 우리 가족도 2년간의 동탄 생활을 접고 지방으로 이사를 했다. 복직과도 친정과도 자꾸만 더 멀어져 가는 결정을 하게 된 남편이 괜찮냐고 물었고, 나는 '한국말 쓰고 하루 만에 택배가 오는 곳'이면 괜찮다고 했다.

산업단지에 조성된 아파트촌이라 시골인데도 공기가 안 좋았고, 부모의 평균 학력이 높지는 않으나 소득이 안정적인 동네 특성상 학원가도 나름 발달된 전북의 강남이랄까.


너른 평야에 멋지게 홀로 우뚝 선 그 동네 최대규모의 유치원 6세 반에 그레이스를 편입시키고 두어 달 지났을 때쯤 아이 반에서 한글 받아쓰기 시험이 시작되었고, 이미 한글을 읽고 쓰기 시작한 그레이스였음에도 난이도가 꽤 있는 시험 수준이라 서너 개씩 틀리고 와 아이가 속상해 울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미친' 소리가 올라오려던 참이었다.


하루는 아침에 아이를 등원버스에 태워 보내고 돌아서는데 아파트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제법 큰 남자아이가 눈에 띄었다. 쟤는 다 큰 아이가 유치원도 학교도 안 가고 왜 놀이터에 있냐고 물으니 '그레이스와 같은 유치원에 다니던 7살 아이인데 받아쓰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 결국 등원을 거부하고 저렇게 혼자 논다'는 것이었다. 그레이스 선생님께 전화를 했다.


'선생님 저희 아이가 받아쓰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집에 와 웁니다.'

'어머나 어머님~~~ 지금쯤에는 받아쓰기를 시작해야 해요. 그레이스는 그래도 잘하는 편이라 몇 개 안 틀리는데요'

'그러니까요 선생님, 똑똑한 저희 아이도 틀리는 게 있을 정도이면 나머지 아이는 더 많이 틀릴 거 아니에요. 여섯 살에 한글을 깨우칠 수도 있고 못 깨우칠 수도 있는 건데 이렇게 당연하게 받아쓰기를 시키시면 우리 그레이스를 포함한 모든 아이들은 다 자기들이 뭔가 모자라는 부진아라고 느낄 거 아니에요. 왜 멀쩡한 아이들을 부진아로 만드세요?'


결국 학원장의 교육철학에 의한 지침이었던 6세 반 받아쓰기는 철회되지 않았고, 그레이스는 어차피 다음 해에 병설유치원에 갈 예정이었던 터라 나는 1월부터 그 무식한 유치원에 아이를 보내지 않았다.


그 후 두 달 겨울 내내 세 아이를 데리고 35평 아파트에 갇혀 지내느라 나는 거의 돌아버릴 지경이 되어 내 허벅지를 찍으며 후회했으나, 유치원을 나서는 내 뒤통수에 대고 '앞서 가지 않으면 낙오된다'던 원장의 말이 틀렸다는 내 판단에는 아직도 의심이 없다.




이젠 기억이 가물가물이지만 큰 수 읽기와 사칙연산, 온갖 화려한 도형문제까지 풀던 유아수학 문제집의 수준에 놀라 찾아본 바에 의하면, 초등 1학년은 수를 50인가 100인가까지 밖에 세지 않는다. 대신 10개씩 묶으며 십진법의 원리를 이해하고, 합하여 10이 되는 짝꿍수에 대한 연습을 많이 한다. 연산도 한 자리수 덧셈, 뺄셈 정도. 2학년에 가서야 곱셈의 원리를 배워 구구단을 익힌다. 그런데 취학 전 유아수학에는 덧셈 뺄셈 곱셈 나눗셈이 다 들어있다니. 거의 초등 4,5학년 내용까지 커버하는 수준이다.


미리 수학을 가르치는 부모의 논리 중에 가장 흔하게 듣던 말이다. '우리 아이가 이해력이 빠르지 않아서 학교에서 수업을 들으면 그 자리에서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아서요. 그래서 미리 가르쳐서 보내려구요.'


물론 아이들마다 성장속도가 조금씩 달라서 평균적인 아이들의 지능성장 수준에 맞추어 짜놓은 학교 수학 커리큘럼이 아이의 성장단계와 차이가 날 수 있다. 그런데, 1학년이 되어서도 1학년 수학을 이해 못할 만큼 수학머리가 한 템포 느린 아이에게, 그렇기 때문에 일곱 살에 1학년 수학을 가르친다면 아이는 더 이해를 못 할 것 아닌가.

내 아이가 1학년때 그만큼 성장해있지 못할 거라는 것도 근거 없는 추측과 기우이지만 진짜로 그렇다면 그 아이는 일 년 더 늦게 입학시켜 늦더라도 준비되었을 때 그 내용을 배우게 해야 하는 게 논리적으로 맞지 않나? 기다렸다 1학년에 가르치면 충분히 이해할 내용을 왜 준비도 안된 일곱 살, 여섯 살 아이에게 가르쳐 아이를 바보로 만드는 거지? 아이에게 '수학은 이렇게 어려운 거야. 네가 이해하기에는 영 무리가 있어 보이지? 노력해도 안돼. 그러니 넌 수학을 포기하는 게 좋을 거야'라는 메시지를 주기로 작정을 하지 않았다면 대체 왜 그런 행위를 하느냐는 거다.


필요도 못 느끼고 준비도 안 된 아이에게 수학을 가르치는 노력을, 차라리 학교에서 배우고 온 후에 이해하고 있는지 살피고 보충시키고 연습시키는데 쓴다면 심리적으로 경제적으로 훨씬 효율적이고 효과적이지 않을까.




그럼에도 그레이스가 수학 예습을 한 적이 있었다.

전주가 가까운 지역이라 일 이년에 한 명씩 그 동네에서도 상산고 합격생이 나오곤 했는데 그레이스 4학년 때 그레이스 친구의 오빠가 상산고에 합격하여 동네에 현수막이 걸렸다. 그런데 그 친구가 그레이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늘 수학을 잘하던 오빠인데 초등학교 5학년때는 엄마한테 수학이 어렵다고 했대. 5학년때부터는 수학이 확 어려워진다는데?'


하도 걱정을 하기에 수학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큰 문제같아 보여, 그럼 겨울방학 때 예습을 하자고 했다. 원래는 내가 설명을 해주고 문제집으로 연습을 하는 식으로 진행하려고 했는데, 엄마의 설명이 영 마음에 안 들었던 그레이스는 그냥 책이랑 문제집 설명을 읽으며 어려운 부분만 간간히 내게 질문했고, 그렇게 혼자 한 학기 예습을 하고 5학년에 올라갔다.


그런데 한두 달 지나서 볼멘소리로 하는 말이 '엄마, 예습 안 하고 학교 갈 때는 아침마다 오늘 새로 배울 내용은 뭘까 궁금하고 기대돼서 학교 가는 게 설레었는데 미리 공부하고 가니 수업이 하나도 재미가 없어요' 하는 것이었다.

'아이쿠 그러면 안 되지. 그럼 이제부터는 예습은 하지 말고 복습만 해.'



그래서 우리는 그 후 예습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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