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제도 안에 '여러 전형'이 있는 것은, 한 가지 잣대로 아이들을 줄을 세워 그 특정 잣대로 평가되지 않는 요소를 놓치는 실수를 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결과이다.
주어진 시간 안에 문제를 빠르고 정확하게 풀어야 하는 지필시험에는 약하지만 날카로운 문제의식으로 탐구과제를 정하고 연구한 결과를 멋들어지게 발표할 줄 아는 아이, 주어진 학업은 성실히 하여 성적을 내지만 앞에 나서서 발표하는 건 힘든 아이, 모든 과목의 성적이 고루 좋지는 않지만 자신의 적성과 흥미와 관련된 과목에서 눈에 띄는 성과를 보여준 아이, 실연의 아픔으로 한 학기 성적을 말아드셨지만 다시 심기일전하여 본 궤도에 올라타 그런대로 멋지게 학교생활을 마무리한 아이들을 똑같은 줄에 세울 수는 없다.
그래서 50명 정원인 한 과에서 여러 전형으로 정원을 쪼개어 뽑는다.
고등학교 3년 동안 열심히 학교생활을 한 후 대입원서를 쓰기 전에 내가 가진 패를 펼쳐보고, 나를 가장 잘 돋보이게 해 줄 전형으로 내가 가고 싶은 학교와 학과에 원서를 넣으면 되는 것이다.
요즘 같은 세상에 정보는 널렸고, 학교에서 선생님들도 도와주시는데, 그 정도를 알아보기 귀찮다고 '그냥 옛날처럼 수능만으로 뽑아! 그게 공평해'라고 한다면, 왜 그게 사실은 불공평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지에 대한 분석도 유튜브 영상이나 기사 검색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고등학교 교사로서 나는 지금의 대한민국 공교육이 완벽하다고 생각지 않는다. 평가방법도 허점 투성이임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러나 세상은 원래 불완전한 인간이 불완전한 제도 안에서 최선을 다 해 사는데 의의가 있는 거다.
고등학교 3년 동안 열심히 치열하게 살아라. 이 기준 저 기준에 맞추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 어떻게든 너는 성장한다. 진짜 문제는 그 과정에서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을 때 도피하려고 한다거나 판을 엎어버리려고 하는 태도이다. '저 자퇴할래요', 혹은 '저 정시파이터 할래요' 같은 소리 하면 나는 자식이든 조카든 더 이상 거두지 않을 테니 그리 알거라.
Q1. 학종이 뭐고 교과가 뭐예요?
대입 전형에는 크게 수시와 정시가 있다.
수시 60%, 정시 40%.
수시는 현역(졸업예정자)들의 잔치, 정시는 N수생(재수, 삼수, 사수,...)들의 잔치.
수시는 6장, 정시는 3장의 카드가 주어진다.
수시를 지원 안 할 수는 있지만, 지원한 이상 다 불합격하지 않으면 정시의 기회는 없다.
수시는 다시
1. 학생부 종합전형(학종)
2. 학생부 교과전형(대부분의 학교장추천전형이 여기 포함)
3. 논술전형
4. 실기전형
로 나뉜다.
수도권은 학종(1번) 비율이 대체로 높고, 지방으로 갈수록 교과(2번) 비율이 높다.
A1. 학생부 교과전형 - 닥치고 숫자
내신등급이 높으면 교과전형 쓴다. (숫자가 작을수록 높은 등급)
그러나 완전 못하는 학교에서 내신만 높고 실력이 없을 수도 있잖아?
그래서 보통은 수능점수의 하한선인 수능최저를 함께 걸어 그런 아이들을 거르거나 면접을 통해 직접 만나보고 이것저것 물어봐서 똘똘한 아이를 찾는다.
고로 '내신만' 보기도 하지만 '내신+수능최저학력기준' 혹은 '내신+면접'으로 전형을 구성하는 게 보통이다.
전체 수강생의 4%는 1등급, 7%는 2등급, 12%는 3등급을 받는 구조인 것을 보면 학생수가 많은 학교일수록,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이 적은 학교일수록 나의 등급이 올라갈 가능성이 크다.
숫자처럼 '객관적'인 게 어디 있는가.
'제가 왜 떨어졌나요?' 물을 때 '너는 2.33등급이잖아. 저 친구는 2.31등급이라서 붙은 거야'라고 하면 찍소리 못한다.
2.31등급의 학생이 2.33등급의 학생보다 더 똑똑한지는 아무도 보장하지 못하지만, 그것만으로 뽑는다고 하면 지원자의 입장에서는 합불을 예측하기가 훨씬 쉽다.
그래서 안전빵으로 교과전형을 두 세장 쓰기 마련이다.
물론 수능시험 전에 수시 지원을 하기 때문에 내가 그 학교에서 요구하는 수능최저를 종국에 맞출 수 있을지는 아직 단언할 수 없지만, 그래도 다섯 학기(수시는 3학년 1학기까지의 생활기록부로 지원한다)를 모두 마쳐 내신등급이 나와 있고 모의고사 본 결과들로 수능결과를 예측해 볼 수 있으므로 깜깜이 전형이라는 학종보다는 불확실성이 상대적으로 적다.
눈치챘겠지만 교과전형은 일반고만을 위한 잔치이다.
A2. 학생부 종합전형 - 숫자의 의미를 묻다
학생부 종합전형은 다섯 학기 동안의 학교생활의 기록인 학교생활기록부(이하 생기부)를 정량(교과전형에서처럼 숫자로만)적으로 평가하지 않고 정성적으로 평가하는 전형이다.
생기부 안에 있는 데이터 중 현재 대학으로 넘어가는 것은 출결, 성적, 각 과목 선생님들이 적어주신 과목별 세부능력특기사항(과세특), 담임이 적어주는 행동발달특성(행발), 자율활동, 동아리활동, 진로활동이다.
학교마다 비율과 세부항목의 차이가 조금씩 있지만 복수의 평가자가 학생의 생기부를 눈으로 보며 채점표의 평가요소마다 5,4,3,2,1 중 한 개의 점수를 선택하고 그걸 다 합쳐 그 결과로 지원자들의 줄을 세우는 식이다.
성적을 물론 보지만 교과전형처럼 성적을 공식으로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1번 학업성취도' 문항에 대한 점수를 결정하기 위해 눈으로 보고 판단한다.
그러므로 공대라면 수학이나 과학점수를 더 눈여겨볼 테고, 기계공학과라면 생명과학 점수가 조금 떨어지는 건 귀엽게 봐줄 수도 있다. 내신 등급이 좀 안 좋아도 수강생수나 과목평균, 표준편차를 통해 그 학교의 특성 등을 추정하여 어느 정도 감안하여 본다. 비슷한 내신 등급이라고 해도 성적이 점점 올랐는지, 자기가 싫어하는 과목이라고 해서 아주 팽할 정도로 극단적인 성격인지 등도 평가를 위해 고려하게 된다.
아, 교과전형에서 말 안 했는데, 교과전형에서 성적을 기계적으로 계산할 때도 전 과목 성적을 다 넣기도 하지만, 학교나 계열에 따라 국수사과영, 국수영사, 국수영과, 제일 잘한 10개 과목, 이런 식으로 골라보기도 하므로 '내일 물리랑 일본어 시험인데 한 과목 밖에 공부를 못 할 상황이다'라고 한다면 취사선택하는 것도 필요하다.
(등급 숫자만을 보는 교과전형에서는 일주일에 세 시간 든 3단위 과목 일본어가 2단위 과목 물리보다 등급이 높아야 좋지만, 기계공학과를 종합전형으로 지원한 학생에게는 단위수가 적어도 물리등급이 높은 게 훨씬 좋다. 예를 일본어로 들었으니 더 얘기하지만, 교과전형이라고 해도 전과목을 모두 동일하게 보는 학교라면 일본어 성적이 들어가지만 이공대이고 그 학교의 교과전형을 계산하는 식에 국수영과만 들어간다면 일본어는 하나도 안 중요해진다.)
선생님들이 진학상담을 할 때 컴퓨터 앞에서 보조 프로그램을 사용하는데, 대학마다 성적 데이터를 계산하는 식이 모두 달라 A대학 식으로는 2.71등급의 아이가 B대학 식으로는 2.32등급이 되기도 하고 심지어 C대학 식으로는 1.98이 되기도 한다. 대학에서 자신들의 계산식을 모집요강에서 밝혀놓지만 일일이 계산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컴퓨터프로그램에 아이들의 성적을 모두 넣어놓고 자동으로 계산해 주는 성적을 보며 합격가능성을 점치게 된다.
Q2. 저는 교과전형이 유리한가요 종합전형이 유리한가요?
특목자사고의 경우에는 학생부종합전형이 주 전형이 되기 쉽다. 그러나 일반계 고등학교라면 6장의 카드를 학종과 교과를 섞어서 쓰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신(중간기말고사), 비교과(교과에서 하는 수행평가나 연구활동, 자율, 진로, 동아리활동 등), 수능을 모두 챙겨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하나라도 부족하면 선택의 폭이 확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다~ 잘할 수 있을까. 세 가지 모두 다섯 학기 동안 최선을 다 한 후에 결과를 보고 나의 약점이 최대한 적게 부각되고 강점이 돋보일 수 있는 전형을 잘 찾아 지원해야 하는 것이다.
내신, 비교과, 수능 중 어느 하나에서 힘을 빼는 결정을 해야 한다면 적어도 2학년 말까지는 끝내고 나서 해야 한다.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 성적을 올릴 수 있는 수능을 주 무기로 하는 정시를 선택한다면 나보다 일 년 이상 더 훈련한 N수생들과 붙겠다는 것이다. 결국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말 안 하겠다. 저주의 말처럼 들릴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좀 더 일찍 수능 준비에 몰입하겠다는 거 아니냐'라고 하는 2학년 학생이 있다면 묻고 싶다. 대체 수능 준비와 내신 준비는 어떻게 다른 공부인 거냐고. 그리고 또 묻고 싶다. 1학년 성적은 안 좋아도 2학년 때 그걸 만회하고 비교과에 신경을 쓴 생기부를 가지고 현역들끼리 겨루라고 판 깔아준 6장의 카드를 대체 너는 왜 버리느냐고.
이 얘기는 길게 하고 싶지 않다. 어차피 그렇게 맘먹은 아이들은 그 누가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는 걸 수없이 봐왔기 때문에. 그저 인생 3~4년 직접 더 헤매고 나야 그때 잘못된 결정을 했다고 말을 하더라.
그래서 우리 조카들이랑은 2탄에서 어떻게 고등학교 생활을 해야 할지, 학종을 잘 준비할 수 있는 팁은 무엇이 있을지를 얘기해보려고 한다.
여기서는 이것만 기억해라.
내신, 비교과, 수능 중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하거나 버리면 안 된다. 일반고에 가기로 했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