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숨돌릴 틈 없이 몰아치던 PT를 끝냈을 때
까맣게 잊었던 기억(또는 감각)이
불현듯 떠오른 적이 있었다
어릴 적에 거실에서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깨어나
지금이 아침인지 저녁인지 도통 분간할 수가 없어서
혼몽하게 눈만 끔뻑이며 벽시계를 뚫어져라
쳐다봤던 일 말이다
PT를 준비했던 두 달이란 시간이 꿈처럼 느껴졌다
골인 지점만 바라보고 죽어라 PT에 매달린 시기였다
그런데 정작 결승선을 통과하는 순간
성취감 뒤에 매복해있던 허탈감이 불쑥 고개를 쳐들었고
나는 그 놈의 정체를 파악하려고 눈을 계속 끔뻑여댔다
팽팽하게 당긴 고무줄이 탁하고 끊어져
두 달 넘게 일에만 매몰된 나를 찰싹하고 때리자
그제서야 자책과 반성이란 단어를 머리 속에 떠올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부랴부랴 인스타그램이나 블로그에서 봤던
여행지를 떠올리며 스마트폰을 뒤적였지만
넘쳐나는 정보에 빠져서 도저히 정할 수가 없었다
어쩔 도리 없이 궁금했다
나한테 정말 필요한 휴가는 뭘까,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었을까
곰곰이 생각을 곱씹고 곱씹고 또 곱씹고
그리고 떠올렸다
나의 휴가는
문득 바다가 보고 싶어지는 일
일면식도 없는 낯선 지명을 그리워하며 기차표를 끊는 일
달력을 꺼내 빨간색 동그라미를 치는 일
실없이 동그랗게 웃어보는 일
치약과 속옷 따위를 가방에 넣는 일
현관 앞에 가방을 눕혀놓고 정작 나는 쉽게 잠들지 못하는 일
알람보다 먼저 일어나 부지런 떠는 일
가방을 둘러메고 기차를 기다리는 일
들떠있는 플랫폼에 풍경처럼 앉아있는 일
기차는 출발도 못했지만 이미 나는 바다에 도착해 있는 일
잠든 커튼을 열어 창 밖을 가만히 내려다 보는 일
풍경이 나를 쉽게 구경하도록 얼굴을 창가에 가져다 놓는 일
어느덧 지평선이 수평선으로 바뀌는 일
무심코 우와하고 탄성을 내뱉는 일
마침내 바다와 만나는 일
바다를 바라보는 일
바다를 보고 보고 또 보는 일
지겨울 쯤이면 막회에 소주 한 잔하고 파도소리를 듣는 일
그러다 문득 일상이 다시 그리워 지는 일
세상에는 수많은 휴가가 있었지만
내가 떠올린, 진정 내게 필요했던 휴가는 저런 모습이었다
지금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다
그해를 시작으로 나는
매년 바다로 떠났다가
매번 일상으로 다시 돌아오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