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3시 50분. 강남 한복판, 세희의 펜트하우스 앞 공원에 찬주가 오토바이를 세웠다. 잠시 후, 평소의 명품 드레스 대신 룰루몽키의 요가복을 입은 세희가 눈을 반쯤 감은 채 비틀거리며 나타났다.
"찬주 씨... 나 진짜 왔어요... 살려줘요..."
"시주, 수행은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자, 시작하시죠."
찬주는 바닥에 가볍게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목탁 대신 헬멧을 톡톡 두드리며 박자를 맞췄다. 세희는 울며 겨자 먹기로 절을 시작했다.
10배, 20배...
"하아... 내 무릎... 내 샤넬 구두 대신 산 이 고무신이 원망스러워..."
50배 경과.
세희의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공원 구석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세희를 노리고 잠입한 경쟁사의 일류 살수(殺手)들이 어둠 속에서 단검을 뽑아 들었다.
"타겟 확인. 곁에 있는 배달부는 무시하고 여자만 쳐라."
살수들이 번개처럼 짓쳐 들어오는 순간, 찬주의 눈이 번쩍 뜨였다. 하지만 그는 일어서지 않았다.
"시주, 77번째 절입니다. 멈추지 마십시오. 마음의 평정이 곧 최선의 방어입니다."
찬주는 앉은 채로 소매를 가볍게 휘둘렀다. 소림의 절예, 철수선(鐵袖仙)! 소매 끝에
서 발생한 강렬한 진공 풍압이 날아들던 살수들을 종잇장처럼 밀어내 벽에 처박아버렸다.
콰당!
"어머, 무슨 소리 안 났어요?"
세희가 고개를 들려 하자, 찬주가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를 눌러 다시 절을 하게 만들었다.
"바람 소리일 뿐입니다. 정진하십시오."
찬주는 한 손으로는 헬멧 박자를 맞추고, 다른 한 손으로는 보이지 않는 지풍(指風)을 쏘아보내며 접근하는 살수들을 하나둘씩 잠재웠다. 세희가 108배를 마칠 때쯤, 공원 화단 뒤에는 기절한 살수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후우... 다 했다! 찬주 씨, 나 어때요? 이제 좀 수행자 같아요?"
땀범벅이 된 세희가 해맑게 웃었다. 찬주는 처음으로 그녀에게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시주의 근기(根氣)가 제법이군요. 상으로 아침 공양은 제가 사겠습니다."
"진짜요?! 미슐랭 식당 예약할까요?"
"아니요, 근처 24시 콩나물국밥 집으로 가시죠. 한 그릇에 8,000원입니다."
세희는 생전 처음 먹어보는 8,000원짜리 콩나물 국밥을 찬주와 함께 먹으며, 그 어떤 산해진미보다 달콤한 승리감을 맛봤다. 하지만 그걸 보는 찬주의 마음은 아주 복잡했다. 소림사에서 그냥 수련을 계속했으면 좋았을텐데. 어찌된 연유인지, 이 여인의 주변에는 보이지 않는 위험들이 지속적으로 닥쳐오고 있었다. 어허, 이러다간 자신이 눈이라도 떼면 큰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단단한 바위위에서 수행정진중인데 큰 파도가 일렁이는 난파선을 보고 뛰어든 기분이랄까. 찬주의 머리속이 복잡했다. 이 또한 인연인가...